대지고등학교 이지은

행복한 책 읽기

떨리는 심장을 움켜쥐며 종이 끝자락을 손끝으로 밀어 넘겼다. 경쾌하게 넘겨지는 종이의 소리와 함께 마지막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헤일즈는 손가락 끝으로 범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리고 발행일 1992년 5월 11일,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실수로 두 장을 넘겨버린 거라 생각하고 앞장으로 돌아가도 결말은 적혀있지 않았다. 책 안쪽에는 찢겨진 흔적의 종이 두세 장이 삐쭉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책방 아저씨를 불렀다. 자다가 일어나신 건지 잠긴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며 다가왔다.
아저씨, 이거 결말부분이 찢겨져 나갔어요. 나의 말에 아저씨는 그래서 뭐 어쩌라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마지막 권이라면 몰라도 마지막 장은 찾기 힘들다는 무언의 표현인듯 싶었다.
이사온 자취방 근처에 각종 전공서적과 여러 가지 장르의 책을 판다는 헌책방이 있다고 여기저기에서 들었었다. 이제 곧 개학이라 늦은 감도 있었지만, 어쩌면 운 좋게 깨끗하고 싼 전공서적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한번 들러본 책방이었다. 역시나 좋은 전공서적은 나와 같은 신입생들이 먼저와 가져갔는지 남은 책은 거의 코 푼 휴지와 같은 상태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시간낭비를 한 것이다. 차라리 소설이라도 하나 사가자는 마음에 책장을 빙빙 돌았다. 우연히 집어든 책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사과나무 살인사건’이었다. 새빨간 배경에 검은색의 나무 한 그루와 거기에 목을 맨 검은 사람, 그리고 검은 나무 속 새빨간 사과 모습의 표지는 추리소설의 오싹함이 제대로 나타나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표지에 이끌려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과수원에 사는 마틸다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의 연인 제이슨, 제이슨은 마틸다와 결혼하여 뉴욕으로 가고 싶어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크게 반대한다. 마틸다를 잊지 못하고 계속 다가가는 전 연인 케빈 때문에 제이슨은 더욱더 빨리 떠나고 싶어하지만 마틸다는 망설인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틸다의 아버지가 사과나무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된다. 조사를 위해 나타난 보안관 헤일즈, 목격자는 없었지만 목격한 동물은 있었다. 마틸다가 아끼는 조랑말 포니였다. 처음은 자살이라는 의견이 컸으나 마틸다의 증언에 따르면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용의자는 평소 결혼을 반대 당해 언쟁이 많았던 제이슨과 딸 마틸다, 그리고 과거에 마틸다를 쫓아다니다가 호되게 맞은 적이 있는 케빈, 이렇게 세 명이었다. 조사를 하면서 헤일즈에게 이끌리는 마틸다와 그를 경계하는 제이슨, 그녀를 스토킹하게 되는 케빈과 그녀에게 약간 끌리게 되는 헤일즈까지. 이야기는 추리보다는 로맨스로 치중되지만 남자 인물들이 매력적이라 점점 더 빠져들었다.
헤일즈를 질투한 제이슨이 결국 한번 다투게 되고 보안관을 공격한 제이슨은 투옥된다. 그리고 약혼자라고 풀어달라고 말하는 마틸다에게 헤일즈는 질투를 느낀다. 외양간에서 포니를 살펴보던 헤일즈는 범인을 알아냈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개연성도 없고 막장에 추리인지 로맨스인지도 알 수 없는 소설이었지만, 막장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 마냥 눈이 아프도록 집중을 해버렸다. 나는 눈에 불을 킨 듯 책장 구석구석을 뒤졌다. 먼지들이 눈과 코를 간지럽히고 책을 떨어트려 아저씨에게 호통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았다. 가뜩이나 엉망이었던 책방이 코끼리가 지나간 듯이 더 처참해지자 아저씨는 손사래를 치며 나중에 찾아볼 테니 그냥 그 책을 갖고 가달라고 한다. 사실 결말이 궁금했을 뿐 구매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저씨의 제안에 나는 공짜로 얻은 책에 기분이 들떠 흔쾌히 허락했다. 책을 품에 안고 걸어가면서 나중에 결말 부분을 찾게 되면 무슨 내용일까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케빈이 범인이고 들킨 그가 헤일즈를 공격하려고 하자 마틸다가 막는 건 아닐까? 제이슨이 알고 보니 죽인 것이었고 마틸다는 그 충격으로 헤어져 나중에 헤일즈랑 잘 되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정말 자살이었을지도 모르고 반전으로 헤일즈가 살인마일 수도 있다는 상상까지 미치자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고 있었다.
웃다가 순간 실수로 책을 떨어트렸다. 놀란 나는 급하게 책을 주워들어 묻은 흙을 후, 불었다. 그러자 책 겉 표지가 약간 떠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레 겉 표지를 띄어내자 그 안에 누군가가 큰 글씨로 ‘결말’이라 써 놓아져 있었다. 의외의 곳에서 발견한 보물마냥 주위를 살펴보다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결말, 범인은 제이슨. 알고 보니 제이슨은 동성애자였고 케빈과 몰래 사귀고 있었음. 마틸다와 결혼하여 그녀까지 죽이고 과수원을 차지해 케빈과 결혼할 계획이었음. 충격 받은 마틸다는 과수원을 불태우고 포니와 함께 여행을 떠남.
결말을 읽은 나는 허무한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책을 잠시 버릴까 했지만 결말을 알기 전까지는 괜찮았기 때문에 이내 그만두었다. 나는 나중에 책방 주인에게 사과할 것을 다짐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결말 없는 글도 괜찮네. 가방 속 책에서 헤일즈가, 제이슨이, 케빈이 그리고 마틸다가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도착하자 집에서 어머니가 보낸 사과 한 박스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사과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 개를 집어 아삭, 하는 소리가 나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이면지 두세 장을 꺼내 한 글자 한 글자 적기 시작했다,.
‘헤일즈는 그를 가리키며 추리를 시작했다…’
결말이 없다면 내가 써주지. 하는 허무한 결말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결말을 써내려 갔다. 완성된 결말이 적힌 종이를 책 맨 뒤에 놓고 호치케스로 찍어 내렸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저자의 이름을 보고는 그것을 흰 종이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 큼지막하게 이름 석 자를 적어 내렸다. 나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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