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예술고등학교 이소연

뒷골목 풍경

“이야, 오늘 아저씨 얼굴 활짝 폈네! 애인이라도 생겼나?”
최씨가 타다 만 돼지껍데기 한 점을 입에 넣고 킬킬거렸다. 썰어 온 염통을 테이블에 올려놓던 은서아빠가 최씨의 뒤통수를 콱 쥐어박았다. 은서아빠는 이곳, 뒷고깃집 ‘찌끄레기들’의 사장이다.
“내일 아줌마 기일이라고 미국서 민석이 온댔잖아, 임마.”
“오, 마이 프랜드 민석! 아메리깐 민석! 그자식, 코쟁이 마누라 겁나 이쁘던데…….”
민석은 은서아빠, 최씨와 동창이었다. 노인이 오버하는 최씨를 향해 혀를 찼다.
“넌 공장 들가서 일이나 혀. 사장이라는 놈이……. 만달이한테 미안허지두 않어?”
만달이, 아니, 만다흐가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만다흐는 최씨네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몽골청년이다. 그는 노인을 보며 몽골에 두고 온 아버지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아버지도 자신의 얘기를 하며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아버지의 주름은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딸랑, 소리가 나며 술집 ‘홍조’의 최마담과 수잔이 들어섰다. 최마담은 파랗게 빛바랜 눈썹문신에 붉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다. 짙은 화장에도 금세 올라오는 홍조는 묘하게도 그녀와 잘 어울린다.
“오빠앙.”
최마담이 콧소리를 내며 최씨에게 들러붙자 최씨는 에잇, 하며 주머니에서 돈을 건넨다. 최마담이 앗싸, 이만 원, 하자 사람들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찌끄레기들 단골들의 채무관계는 이렇게도 꾸깃꾸깃하고, 소소했다.
노인은 자정이 넘어서야 찌끄레기들을 나섰다.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질질 끌었다.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골목이 바닷물처럼 울렁거렸다. 그래도, 그는 오늘 기분이 좋았다. 내일은 아들네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낡은 오토바이 손잡이를 꼭 쥐었다. 아내 생각이 물씬 났다. 노인의 아내는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동네 뒷골목을 돌다 찌끄레기들에 들어가서 노인과 함께 소주 한 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말하던 소박한 여자였다. 노인은 아내의 삭은 젖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그리워 머리에 쓴 낡은 털모자를 벗어 품에 안았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떠준 선물이었다. 빨강이 참 곱지요, 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집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들이 다녀간 집은 너무 깨끗하고, 너무 쓸쓸했다. 그리고 그들이 분주히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왠지 짐짝이 된 것 같아, 그는 열쇠를 쥐어주고는 도망나오곤 했다.
방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전화기를 들어보았다. 내일 오후쯤 온다고 했으니 지금쯤 비행기를 탔을 것이었다. 전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내일이면 볼 건데 뭘, 노인네가 재촉한다고 싫어할 게야……. 그래도 일 년 동안 전화 한번 안 했는데……. 아냐, 설마 제 에미 기일을 까먹었겠어? 오겠지, 암. 노인은 그렇게 늦게까지 잠을 설치다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올 쯤에야 잠이 들었다. 누런 장판 위에 녹색 얇은 이불을 덮은 노인의 몸은 마치, 곰팡이 같았다.

“아저씨.”
노인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만다흐였다. 오, 만달이구나.
“오토바이, 안 탄다?”
만다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정오의 햇살이 노인의 웃음을 더 환하게 밝혔다.
“오늘은 멀리 안 나갔어. 요 앞에 슈퍼 갔다 오는 거여. 쫀디기 사러. 손주 오잖우. 만달씨도 하나 먹어볼텨?”
노인이 쫀드기를 건네자 만다흐는 머뭇거리다 받아서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끈끈한 침과 함께 입 안을 맴돌았다. 만다흐는 물끄러미 노인이 들고 있는 까만 봉지를 보았다. 쫀드기, 과자, 요구르트 등 온갖 군것질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릴적 아버지가 사다주시던 간식들이 생각났다.
“이제 곧 애들 올 것 같아서. 나, 간다.”
만다흐는 휘적휘적 서둘러 걷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윈 어깨가 위태로워 보였다.

밤은 질주하는 오토바이보다도 빠르게 다가왔다. 노인은 마당에 세워둔 오토바이 위에 앉아 담배만 태웠다. 반짝, 반짝이는 붉은 빛이 반딧불 같았다. 혼자 조용히 앉아 있으니 왁자한 찌끄레기들이 생각났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보았다. 크르륵, 쿨럭,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며 시동이 걸렸다. 노인은 다시 시동을 껐다. 아들네가 와서 오늘은 가지 못할 거라고 큰소리를 쳐 놓은 마당에 거길 갈 수는 없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와 아내의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어린 민석이를 안은 젊은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내의 환한 미소도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 사진을 오토바이 바퀴에 기대어 세워두고 그 앞에 모래를 모아 담배를 꽂았다. 노인은 천천히, 절을 했다. 작년, 아내의 장례가 떠올랐다.
아들은 바쁜 일이 있어 장례에 가지 못하겠다고, 첫 번째 기일에는 꼭 오겠다고 했다. 노인은 빈 상주자리에 멍하니 앉아 빨간 털모자만 쥐고 있었다. 아내의 심장을 쥔 것만 같이, 따스했다. 아내의 장례였지만 민석이 보낸 회사사람들만 바글거렸다. 그들은 아내의 나이만 듣고 호상이네, 호상이야, 하며 술을 들이켰다. 찌끄레기네, 뒷골목 식구들만이 그런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증말, 일어나요, 일어나.”
보다 못한 최씨가 노인의 팔을 끌었다. 노인이 위를 올려다봤다. 은서아빠가 보양식으로 먹는 돼지불알찜을 내밀었다.
“우리가 상주 해 줄게요.”
최씨와 은서아빠, 만다흐는 돌아가며 상주 역할을 했다. 최마담과 수잔을 팔을 걷어부치고 음식을 날랐다. 번지르르한 민석의 손님들과는 다르게, 뒷골목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차림인 그들이었지만, 노인은 그들 앞에서야만 울 수 있었다.
아들은 노인이 담뱃불 앞에 두 번의 절을 할 때까지 오지 않았다. 노인은 엎드린채로 일어날 수 없었다. 이대로 일어나 절을 끝내버리면 기일에는 꼭 오겠다던 아들의 약속이 완전히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일어날 수 없었다. 땅에 닿은 이마가 모래에 버석거렸다.
“파파…….”
노인의 어깨에 온기가 느껴졌다. 만다흐였다. 만다흐는 조심스레 노인을 일으켜 오토바이에 태웠다.
“꽉, 잡아요. 여기.”
노인은 말없이, 머뭇거리며 만다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나며 시동이 걸렸다. 둘은 찌끄레기들을 향해 달렸다. 찌끄레기 인생을 사는 뒷골목 사람들이 모여 찌끄레기 고기를 먹는 그곳으로. 수도 없이 달려 이제는 눈감고도 달릴 수 있는 그 골목들을 달려서.
노인이 만다흐의 등에 뺨을 기댔다. 나무껍질 같은 뺨에도 아직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세포가 살아있음에 노인은 놀랐다. 바람마저도 낡은 듯한 뒷골목의 공기가 목덜미를 훑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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