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상
여우비
나윤정 (경기여자고등학교)

여수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여자는 비로소 자기가 쉬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귓밥과 입술과 왼쪽 새끼손톱까지 완전해졌다. 거뭇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완전하게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낡은 소형차를 지키고 있는 사랑스러운 누구와 함께 여독을 품고 싶었다. 아흐레면 충분할 것이다
사랑스러운 누구는 밤이 가까워지도록 귀를 접고 있었다. 그가 귀에 걸고 있는 도금 귀걸이는 흠집하나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마음이 가벼워 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변해가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자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의 접힌 귓밥을 지키고 있는 그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들떴다.
“거지같이. 그게 뭐야. 그 고무줄 좀 빼, 진짜 웃긴 거 알아?”
“괜찮아. 이게 어떤 건데. 흠집나면 안 되니까.”
그가 눈꼬리를 가늘게 세우며 웃었다. 역시 사랑스러웠다. 그가 제 자리를 찾았을 때 건넨 징표였다. 귀걸이를 받기 전에는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귀를 열고 다니던 그가 변했다는 사실이 사랑스러웠다. 여자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맥주 한 잔을 권했다. 마치 넥타르를 받아먹듯 다섯 손가락을 잔에 밀착시키고 한 모금씩 깔짝거렸다. 사라진 노을 아래서 그들은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그는 귀를 접어놓고도 무슨 소리가 그리 잘들리는지 끊임없이 무어라고 종알거렸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유영하는 하얀 물방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반경 1센티 거리에 있는 사랑스럽게 접힌 귀를 쓰다듬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손목시계의 절반이 돌아갈 때까지 여자는 혼자 앉아있었다. 과로가 어둠에 접힐 무렵 완전히 지친 여자는 그를 찾아갔다. 민박집 뒤켠에 있을 그를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풀벌레는 잘도 울었다. 여자는 남자 화장실의 나무문을 손으로 세게 두드렸다. 그의 전화는 오랫동안 통화 중에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곳의 필경 그 안의 소리는 여자의 노크보다 더욱 거세고 놀랍고 답답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구. 내일이면 올라갈거야.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일랑 붙들어매. 어차피 한 번 끝낸 사이니까 어렵지 않아. 그래, 아들인 것 같다고? 일단 몸조리 잘해. 장인어른이 좋아하실 거야. 이번에 내 자리..아니, 우리 아이만 제대로 낳으면 우리 아버지도 암말 안 하실거야. 그래, 진짜야. 내일 올라갈게...”
경동맥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조잡한 흰색으로 윤색된 문을 있는 힘껏 걷어차고 싶었다. 발목이 문 한가운데를 메다꽂았을 때 여자의 눈앞에 귀를 완전히 편, 눈이 굼뜬 남자 하나가 바지를 추키는 것이 보였다. 그 어리석은 모습에 여자는 극도로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 상황에서도 사랑스러움이 살금살금 새어나왔다. 여자의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귀를 편 남자는 아주 교만하고 담당했다. 여자가 아는 귀를 접은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흰자위를 벌름거리며 여자의 앞에 다가왔다. 맥주 한 잔이 목구멍으로 모조리 올라왔다.
“내가 뭐랬어. 우리는 안 된다고 했잖아.”
“애초에 확실했어야지, 왜 일을 이렇게 만들어?”
“되도 않는 일에 뛰어든 네 잘못이야. 서른 여섯에 임신이라니...집안을 뭘로 본거야?”
“아무것도 안 봤어. 네가 누구라는 것은 신경도 안 썼어?”
“착각하지 마. 너도 조금은 봤을걸. 한순간에 세상이 너한테 떠나가니까 나라도 잡으려고 했던 거 아니야. 아닌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헛일에 말려들었다. 결국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귀를 편 남자는 그 태도는 질렸는지 손가락으로 귀걸이를 있는 힘껏 낚아챘다. 피가 철철 흘렀다. 그의 귓밥에서 시작한 피는 여자의 손톱께를 더럽게 적셨다. 질척한 흙 위에 붉은 것이 뚝뚝 떨어졌다. 해변 바깥으로 여우비가 세차게 내렸다.

별안간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풀벌레는 잘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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