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칼럼]

토블론 초콜릿 2개의 의미 

 

 

 

 스웨덴의 모나 살린 전 부총리는 스톡홀름의 슈퍼마켓에서 조카를 위한 토블론 초콜릿을 포함한 생필품 약 34만 원어치를 구입하려던 찰나 다른 결제 수단이 없음을 깨닫고 법인카드를 이용했다. 이후 개인 돈으로 카드대금을 갚고, ‘매월 카드 사용내역을 일반에 공개한다’는 정보공개 원칙에 따라 이를 신고했다. 스웨덴 신문 <엑스프레센>은 “정부와 국민의 돈과 개인 돈을 구별하지 못한다”며 살린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실질적으로 자신의 돈을 사용한 것으로 문제가 없다며 법적 대응을 검토했지만, 이미 여론은 악화돼 결국 다음 선거에서 낙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토블론 사건’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손꼽히는 스웨덴에서는 세금 부담이 GDP 절반을 차지한다. ‘어떻게 소득의 반을 세금으로 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려다가도 위의 일화에 확연히 드러나는 스웨덴 정치의 청렴성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가의 정치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직결된다. 교육과 의료를 포함한 복지를 통해 국가는 개인에게 안정된 삶을 제공하려 노력하고, 개인은 세금이 효율적으로 쓰일 것이라 믿으며 기꺼이 높은 세금을 낸다. 결국 금액 자체의 문제가 아닌 ‘신뢰’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국민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을 믿지 못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위장전입, 세금탈루, 편법증여, 부동산 투기 등을 이유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일이 빈번하다. 사회통합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국회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5.6%에 불과했고 ‘신뢰할 수 없다’의 비율은 72.8%에 달했다. 최근에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의 근간조차 흔들리고 있다. 권력을 견제하고 공정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언론 역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정부와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이렇게 낮은데, 하물며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에 대한 믿음은 얼마나 약할까. 노동자는 자본가를 믿지 못한다. 대기업의 산업재해 불인정 문제나 중소기업에 대한 횡포 문제는 불신을 초래한 대표적 사례다. 교육서비스를 판매하는 또 하나의 기업, 대학을 학생은 믿지 못한다. 금액 자체보다 중요한 등록금 사용내역에 대한 투명한 보고를 바라는 마음으로 ‘반값등록금’을 외친다. 당연히 신뢰로 지켜져야 할 관계들 사이에 더 이상 믿음이 남아있지 않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폭력으로부터 놓여났지만 타락한 현실 앞에 무방비상태로 던져진다. ‘의사의 무관심’ 때문에 ‘도수장 속의 망아지’처럼 외아들이 죽고, 중들은 돈을 좇아 종교를 팔고, 병원에서는 치료약의 함량을 속인다.”는 내용을 담은 박경리의 단편소설 <불신시대>(1957)가 만약 2013년에 쓰였다면 이런 내용이었을까. “자본주의 앞에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낳고, 언론은 돈을 좇아 갈피 잃은 펜대를 놀리고, 국가는 앞장서 국민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  

 

 현존하는 유토피아 스웨덴보다 허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세상이라니. 혹시 토블론 사건에 대해 ‘34만 원쯤이야,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진 않았던가. ‘이 정도쯤이야’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으로 무너뜨리기 시작한 원리·원칙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신뢰를 잃은 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아래가 없는 위, 좌가 없는 우,  주변이 없는 중심이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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