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추는 구도자, 무용가 홍신자 동문(63 졸) 인터뷰

길게 찢어진 눈 때문에 어릴적 별명이 호랑이였다는 그녀는 매서운 눈매와 달리 다정하고 재치있는 할머니였다. 집 주소를 적어주며 놀러오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순수한 소녀같기까지 했다. 영문학도 였던 그녀가 춤을 추기 시작한지도 46년, 몸은 70대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20대인 무용가 홍신자를 만나 춤추듯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춤을 만나다
“해방 전 우리 가족은 만주를 옮겨 다녔어.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적응하면 떠나고, 정들면 헤어지는 생활이 반복됐지. 그러다보니 쓸쓸함과 슬픔, 공허함을 많이 느꼈어. 여느 애들답게 뛰어놀지도,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았지.”
  1940년, 대한민국이 해방되기 5년 전 충청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홍신자는 어릴 때부터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인생의 단맛과 행복보다 쓴맛과 허무함을 먼저 배웠다. 6ㆍ25를 겪고 나선 더욱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사라졌다. “특별한 꿈이나 희망 없이 그저 남들 하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에 갔지. 영문과를 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어.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선 어떤 것에도 열정을 느낄 수 없었지.” 그녀는 새로운 곳에 진짜 삶이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호텔경영학을 공부한다는 명분으로 유학길에 올랐지만, 미국에서의 공부도 그녀의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다. “한 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뒀어. 내 길이 뭔지는 몰라도 이 길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거든. 공부할 시간에 미국을 돌아다니며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지. 호텔경영은 내가 유학을 온 이유였기 때문에 학교보다 시간활용이 편한 학원을 다니면서 나머지 시간에 뉴욕 곳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 노력했지.”
  마침내 그녀는 가슴 뛰는 일을 찾는데 성공했다. 우연히 브로드웨이의 댄스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홀에서 만난 사람들과 파트너가 돼 다양한 춤 기술을 배웠지. 춤을 추면서 맘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 날 이후로는 춤추고 싶단 생각밖에 없었지. 아직도 춤 출 때의 내 감정을 단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춤을 출 때 내가 가장 열정적이고 행복해진다는 사실이야.”

무용가가 되다
춤에 눈을 뜬 뒤로는 뉴욕에서 공연되는 현대무용을 모두 보러 다녔다. 어떤 무용가를 역할 모델로 삼을지 찾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점차 큰 브로드웨이 무대가 아닌 작은 스튜디오에서 공연하는 실험무용가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좁은 무대에서 자신만의 춤사위를 만드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나만의 동작을 만드는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결국 무용학원에 등록했는데, 그 때가 27살이었지. 유연성이 없어 처음 몇 달간은 다리 찢기하고 앓아눕기를 반복했어.”
  전문적인 공부를 위해 뉴욕대학원에서 무용을 배우던 중, 현업 무용가를 해보지 않겠냐는 학장의 권유에 졸업을 1년 앞두고 대학원을 나왔다. 뉴욕대학원 시절 만들었던 작품을 다듬어 신인 안무가를 뽑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 때 만든 작품이 데뷔작인 ‘제례’야. 이 작품은 세 개의 장면으로 이뤄지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면에선 한국식 속옷을 입고 나와 온 몸과 소리로 통곡해. 마지막 장면은 무대 중간에 제사상을 두고 촛불에 제문을 태우는데, 내 지난 삶에 대한 고통과 한을 태워버린다는 의미지.”
  제례는 미국인들에게 호평을 받아 주말마다 공연됐고 예술 잡지와 뉴욕타임즈에도 실리게 됐다. 하루아침에 미국에서 주목받는 무용가가 된 그녀는 한국에서도 공연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친구의 소개로 국악인 황병기 선생을 알게 됐다. 황 선생은 그녀의 공연을 위해 명 동국립극장을 대관했다. “가슴 벅찬 일이었지. 당시 국립극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상의 시설을 갖춘 공연장이었으니까. 그러나 파격적인 내 공연이 한국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까봐 한 편으론 걱정도 됐어.”
  그녀의 한국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공연 시작 전 관객들이 표를 사기위해 을지로까지 줄을 섰고, 여러 언론이 그녀의 공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녀의 춤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당연히 부정적인 시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반응에 상처받거나 다시 한국을 떠나야겠단 생각을 하진 않았어.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니까 그들의 반응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받아들였지.” 그러나 그녀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유신체제의 억압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연 음악부터 의상까지 제한했다. 심지어 공연이 몇 시간 전에 취소되기도 했고, 공연 후 시청 심의과에 불려가 ‘왜 그런 춤을 추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 이유로 예술이 억압받는 사실에 좌절한 그녀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

웃는돌 무용단과 죽산국제예술제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또다시 허무함을 느꼈다. 춤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무대의 적막은 곧 허무함으로 돌아왔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처럼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3년간 인도에 있으면서 명상수행을 하고, 철학자와 성자들도 만나며 구도의 길을 걸었어. 그리고 그 곳에서 순수한 ‘웃음’에 대해 알게 됐지. 날 억누르던 어릴 때의 기억들을 떨쳐버리자 삶이 웃음으로 가득 차게 됐고, 세상 모든 존재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나는 이것을 춤으로 표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인도생활을 마친 그녀는 미국에서 ‘웃는돌 무용단’을 만들었다. 주로 무용을 늦게 시작한 사람들로 구성된 웃는돌 무용단은 철학이 담긴 무용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10년간 공연을 했다. 창단 12년 만에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단원으로 구성된 웃는돌 무용단을 만들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이 예술단체를 후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나도 여러 기업에 후원을 부탁했지만 다들 꺼렸어. 결국 재정적 문제로 정기적인 공연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지. 요즘도 사람들이 쉽고 재밌는 공연을 더 즐겨보기 때문에 무용 같은 순수예술은 설 자리가 없는 게 현실이야.”
  한국 웃는돌 무용단을 창단하면서, 국내에 들어와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서울과 가까우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경기도 죽산면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귀국 소식을 들은 젊은이들이 그녀를 찾아 죽산으로 왔고, 그들은 함께 생활하며 마을 한편에 야외공연장을 만들었다. 죽산 국제예술제의 무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웃는돌 무용단을 주축으로 하는 죽산 예술제는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조그만 지역축제였어. 그러나 이젠 세계적으로 알려져 행사 1, 2년 전부터 공연하고 싶다는 연락이 올 정도야. 그럴 때면 가슴이 벅차지. 내가 처음부터 실패할까봐 두려워했다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한 번 떠오른 아이디어는 실천에 옮기고 성공을 떠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지.” 죽산국제예술제는 그녀에게 ‘예술감독’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사했다.

앞으로의 목표
무용을 시작한지 46년, 그녀는 어느덧 칠순을 넘었지만 여전히 춤을 춘다. 올해는 존케이지 탄생 100주년과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동서양인, 존 케이지+백남준+홍신자 = 251’전을 직접 기획해 공연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힘들단 생각을 한 적은 없어.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동작들로 작품을 만들면 되니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처럼 나는 60대에 춤에 대한 열정이 더 샘솟았고, 비로소 내 춤 세계를 형성했어. 70대가 된 지금은 그것이 한창 무르익는 것을 느껴. 80이 되면 활짝 개화해서 절정을 이룰 것 같아. 춤에는 정년이 없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까지 춤을 출거야.”
  그녀는 죽산에 있는 웃는돌 사무실을 아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찾아와 함께 농사짓고 생활하며 자연 속에서 삶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웃는돌 예술중학교와 대안학교 설립 등, 27살에 꿈을 찾은 늦깎이 무용가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떤 일을 하기에 늦은 나이는 어디에도 없어. 남들이 일찍 시작했다고 해서 조급할 필요도 없지. 남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내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 시작하면 돼.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기 바쁜 젊은이들 대신,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일을 찾는 젊은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아쉬람: 자연과 어울리며 마음 수행을 위해 쉬었다 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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