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돌아왔다. 가을은 언제나 바쁘고 고된 우리의 마음을 더욱 허전하게 만든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집에 돌아가는 가을 밤, 누구나 한번쯤 ‘난 도대체 왜 살지’하는 푸념어린 질문을 읊조려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극히 철학적인 질문 앞에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사는가하는 질문에는 정말 답이 없는 걸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스피노자와 헤겔, 니체, 하이데거 그리고 레비나스의 주장을 알아봤다.

인간의 존재이유

  서양철학사의 봄이라 불리는 시기인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연 인간의 존재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영국 청교도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 그리고 프랑스 혁명까지 굵직한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스피노자와 헤겔은 어떤 다른 의견을 내놓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이성적 사고를 통한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사고를 즐겨 사용했다. 목적론적 사고란 모든 존재의 목적을 탐구하는 생각의 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수컷 새의 화려한 깃털은 암컷 새를 유혹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한다’라는 식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같은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존재처럼 인간도 어떠한 목적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여겼다. 그가 말한 행복은 그리스어로 ‘잘 존재하는 것(well-being)’을 뜻했다.

  그렇다면 잘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사고와 도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성적 사고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다. 우리는 그것을 잘 갈고 닦아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도덕이 필요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은 도덕적인 성품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예속을 벗어난 자유  

  스피노자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법칙이나 관습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그러한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일 비록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그의 명언에는 그 생각이 잘 담겨있다.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오는 공포와 불안감에 메이기보다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으로 자신의 자유를 찾겠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면에는 시대적인 영향이 컸다. 그가 살았던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관습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종교와 관습이라는 외부적인 억압 외에도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억압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모든 예속을 부정적으로 바라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자 했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헤겔-끊임없는 변화 끝의 절대이성

  헤겔의 철학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만물의 본질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원인을 만물의 내부에서부터 생겨나는 자기부정과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변증법은 쉽게 정반합(正反合)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물의 기본 상태가 정(正)이라면 자기부정에서 비롯되는 모순이 반(反)이다.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그로 인해서 합(合)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생성된 결과물인 합은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이 돼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무한히 반복한다. 이 과정은 최고 지점인 절대이성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 같은 변증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보면 인간 존재의 목적은 절대이성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아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고차원적인 이성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목적인 것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직후의 어수선했던 시대를 살았던 니체 그리고 1,2차 세계 대전을 겪었던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급격한 시대 변화 속에 놓였던 그들은 과연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알아보자.

◆니체-자아실현의 과정 그 자체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던 니체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든 가치의 창조자’라고 믿었다. 또한 니체는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는 인간을 ‘초인’이라고 정의했는데, 그 초인이 되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 모든 것은 영원한 무(無)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되돌아온다는 주장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의 인간은 언젠가 죽을 테지만 결국 다시 돌아올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니체는 인간을 영원히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고 봤다. 따라서 니체는 삶이란 자아실현을 위한 방편으로서 그 자체로 무한히 노력하며 살만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이데거-삶은 죽음의 역(逆)

  하이데거는 인간을 ‘피투성이’라고 정의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상태의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서 세계를 살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불안을 느끼며 사는 존재이다. 피투성이들은 ‘어차피 삶의 끝에는 죽음인데, 나는 왜 살고 있을까?’하는 불안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러한 질문을 통해 죽음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던 것처럼 죽음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위와 같은 생각을 토대로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은 피투성이들이 각자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는 모순되게도 죽음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삶의 진정한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타자에 대한 책임과 연대감 

  레비사스는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는 한편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통해 세계를 이루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철학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레비나스는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자신도 독일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개인적인 상처를 딛고 인간의 윤리성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 결과 기존의 서양 철학에는 내가 아닌 타자에 대한 본질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다른 이’와 ‘다른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쟁과 전체주의의 철학을 낳게 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서양의 자아중심적 철학에 대립해서 다른 이의 존재를 존경하고 다른 이와 함께하는 ‘타자성의 철학’ 또는 ‘평화의 철학’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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