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라이벌]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옷을 입고 싶어 하죠. 명품 의류 브랜드 ‘샤넬(Chanel)’도 그 중 하나입니다. ‘샤넬’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의 의상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련미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에게도 라이벌은 있었습니다. 바로 ‘패션계의 초현실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엘자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입니다. 우리에게 샤넬이 익숙한 데 비해 스키아파렐리는 조금 낯설죠. 때문에 그녀가 샤넬의 라이벌이었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930년대 당시 이들은 각자 다른 패션 철학으로 유행을 선도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시대를 주름잡은 두 여성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가브리엘 샤넬은 본명보다는 ‘코코 샤넬’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합니다. 이는 그녀가 18살에 카바레에서 ‘누가 코코를 보았나요’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면서 붙여진 별명이죠. 샤넬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에게서 버려져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곳에서 자연스럽게 바느질을 배우게 된 그녀는 낮에는 보조 양재사로, 밤에는 카바레에서 가수로 일하며 디자이너로 성장했습니다.

샤넬은 실용성이 극대화된 옷을 주로 선보였습니다. 샤넬이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1920년대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발을 덮는 긴 치마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샤넬은 여성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편리성을 강조했죠. 샤넬이 들고 나온 무릎길이의 스커트와 여성용 바지, 어깨에 메는 핸드백 등은 당시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당시의 전문가들은 샤넬이 당시 여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죠. 그녀가 남긴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 한 것이 아니다”는 말은 그녀의 패션 철학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기능성을 중시한 샤넬의 옷과 달리 스키아파렐리의 옷은 예술성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그녀는 “옷이 단지 입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죠. 그녀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1930년대에는 초현실주의가 예술가들 사이에서 큰 흐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스키아파렐리는 이러한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독특한 옷을 많이 디자인 했죠. 그녀는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와 많은 교류를 하기도 했죠. 그녀가 만든 옷 중에는 하얀색 이브닝드레스에 붉은 빛의 랍스터 그림이 그려진 옷이 있는데, 이 랍스터를 달리가 그려줬다고도 하죠. 이처럼 그녀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화가와의 협력을 통해서 환상적인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스키아파렐리는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소재를 처음으로 의상에 사용했을 만큼 혁신적이었습니다. 나일론 등의 합성 섬유를 처음 사용한 것도 그녀이며, 처음으로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지퍼를 의상에 적용시킨 것도 그녀였습니다. 요즘 ‘핫핑크’로 널리 알려진 강렬한 색감의 분홍색은 이미 수십 년 전 그녀가 ‘쇼킹 핑크’라는 이름으로 의상에 사용하곤 했죠. 또 그녀는 하이힐 모양의 모자나 표범 얼굴이 그려진 베레모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스키아파렐리가 시대를 앞서간 개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샤넬만을 기억하는 이유는 상품성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샤넬의 옷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뛰어났기 때문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스키아파렐리의 옷은 ‘상품’이라기보다는 ‘작품’에 가까웠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여배우들이 시상식에서나 입는 수십억대의 드레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녀들은 쟁쟁한 실력을 겨루며 각자의 스타일로  패션의 역사를 써내려간 라이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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