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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제자에게
숙대신보  |  smpkmj80@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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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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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제자가 찾아왔다. 코스모스 같은 이미지의 아이다. 도서관 앞을 지나다 교내 방송으로 '향수'라는 노래가 들려 와 불현듯 내가 떠올랐단다. 나는 늘 강파른 수험생활로 황량해져 가는 아이들의 감수성을 어떻게든 건드려 주고 싶어 했다. 그 중 하나가 간이 합창대회다. 대상은 문학교과서에 실린 정지용의 시 '향수'를 가르칠 때면 나한테 수업을 듣는 서너 학급의 아이들이다. 나름의 화음도 준비해 가며 모두들 열심이다. 상품은 아이스크림이면 그만이다. 그 하루 이튼, 아주 짧은 연습 동안 아이들의 얼굴은 성취감으로 충만하고, 교무실까지 들려오는 아이들의 하모니에 나도 낭만을 만끽한다. 문학의 힘이다.
   또 한 제자가 찾아왔다. 남자친구가 생겼단다. 며칠 있으면 만난 지 백일이라는 말을 하는 아이의 얼굴이 화사하다. 많이 사랑하나보다. 아이가 돌아간 후 그 사랑이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데, 뜬금없이 이 시가 떠오른다.

  "(전략)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 누가 와서 나의 /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에서 -

    켜지 않은 라디오는 그저 무의미한 사물일 뿐이다. 버튼을 눌렀을 때 라디오는 비로소 전파를 발산하고, 그 전파는 누군가의 가슴 속에 스며들어 감정을 유발한다.
    사랑은 이처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인 '나'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주기를, 그래서 '그'에게로 가서 '그'의 가슴에 잔잔히 스며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 무척 낯익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김춘수의 명시(名詩) '꽃'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패러디는 흔히 엉뚱한 발상으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반전'이 감추어져 있다. 좋은 패러디는 반전을 통해 시대정신의 핵심을 꿰뚫기도 한다. '하면 된다!' 획일주의가 횡행하고 강압적이던 권위주의 시대를 대변하던 표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하면 분명 불가능한 일이 있음에도 무조건 해 내라는 것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의 억지 논리다. 패러디는 이를 살짝 비꼰다. '하면 되디?' 참으로 통렬하지 않은가? 이처럼 패러디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우리들은 모두 / 사랑이 되고 싶다. /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 라디오가 되고 싶다. "

   반전과 통렬함이 깔려 있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이다. 마치 라디오를 켜고 끄듯 쉽게 만나고 그만큼 쉽게 헤어지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그런 사랑은 아무리 열렬하더라도 남는 것이 없다. 결국 김춘수의 '꽃'이 인간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지극히 진지한 목소리로 통찰한 시라면, 장정일의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은 자칫 일회적이고 편의적일 수 있는 인스턴트식 만남과 사랑을 경쾌하고 감각적인 목소리로 풍자한 시이다.
   물론 첫 사랑만이 소중하고 감미로운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사랑도, 세 번째 사랑도 각각의 빛깔과 절감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마련이다. 따라서 아무런 감흥도 없으면서, 권태감을 느껴 가면서 책임감만으로 만남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다만, 라디오처럼 켜고 끄지는 말자. '만난 지 100일 기념일!' 제발 그런 것좀 하지 말자. 백일 만나는 게 무어 그리 버거워 '기념(記念)까지 해야 하는가?

 
 

 

김인봉 선생님      

 

(잠실여고, EBS 국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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