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재미는 비단 쟁쟁한 선수들의 불꽃같은 슈팅, 수비수를 요리조리 따돌리는 화려한 개인기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월드컵에는 이를 능가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바로 ‘스타일’ 보는 재미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입는 옷이 그 팀의 위상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던 유럽은 2000년도 초반부터 유명 디자이너에게 선수들의 단복을 맡겨왔다.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이름만 들어도 휘황찬란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 디자이너들은 각 대표팀의 양복을 제작해왔다.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수트(Suit)’를 맞췄다. 바로 제일모직‘ 갤럭시(Galaxy)’가 만든 ‘프라이드 일레븐 수트(Pride Eleven Suit)’이다. 이름부터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위상과 자존심이 느껴지는 ‘국대 수트’를 제작한 사람은 바로 이은미(의류 88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다. 우리 학교 의류학과 졸업작품전에서 턱시도를 만들며 처음 남성복 제작에 발을 딛었다는 그녀. 이후 이 동문은 남성복의 매력에 푹 빠져 20여 년 동안 ‘수트’와 사랑에 빠져 있다.
-최초로 국가대표팀의 수트를 제작했다는 것, 굉장한 영광이겠어요.
당연하죠. 국대 수트를 제작한 것이 제 자신에게도, 또 제가 속해있는 회사에도 큰 의미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위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예전 우리나라 선수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트레이닝복을 입었어요. 그러나 영국, 독일, 이태리 등 월드컵에 출전하는 다른 나라 선수들은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에서 디자인한 옷을 입고 등장했죠. 갖춰진 모습이 선수들의 기량과 국가 이미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요. 늦었지만 이번 월드컵부터라도 국가대표 단복이 마련돼 다행이에요.
-‘국대 수트’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심지어 허정무 감독이 맨 ‘두골타이’는 없어서 못 팔았다고 하더라고요
반응이 매우 좋았죠. 매출도 전년대비 40%나 올랐거든요. 물론 월드컵 특수가 있긴 했지만, 정말 공들여서 수트를 만들었어요. 허정무 감독, 선수들을 몇 차례나 만나서 상의하고 피팅(fitting)했어요. 디자인 후보가 100여개나 됐다니까요. 이렇게 노력한 결과, 우리나라의 상징ㆍ전통인 태극마크와 수트의 기본적인 특징인 클래식(Classic), 거기에 세련미까지 잘 어우러진 수트가 탄생할 수 있었어요.
-혹시 다른 국제 운동 대회의 선수들 옷도 준비하고 있나요?
프라이드 일레븐 수트 이후로, 축구연맹에서 계속 연락이 와요. 여자 축구대표팀 경기 때도 한참 제의가 왔죠. 앞으로도 대표팀 옷을 디자인하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이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옷발’에서는 밀리지 않겠어요. 어떤 선수가 옷발이 가장 잘 받나요?(웃음)
한 명을 꼽을 수 없네요. 제가 피팅하느라고 선수들의 몸매를 쟀는데, 너무 몸이 다부져서 마치 조각 같았어요. 보통 축구선수들이라고 하면 몸이 두껍고 근육이 우락부락해서 통을 작게 하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도 제작하기 전에 고민이 많았지만, 그들을 직접 만나고 나서 결심했죠. ‘그들의 아름다운 몸매가 부각되도록 디자인해야겠다!’
-박지성, 이청용 선수의 몸을 직접 쟀다니! 부러운데요?(웃음) 이력을 살펴보니까 남성복 분야에서만 일 했던데, 여성복과는 다른 남성복만의 매력이 있나요?
남성복, 즉 수트는 ‘깊이’가 매력이에요. 여성복은 유행에 매우 민감해서 주기가 빨라요.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죠. 반면에 남성 수트는 변하지 않는 듯하면서 은은하게 변해요. 클래식하면서도 베이직한 것을 좋아하는 제 취향과 잘 맞는 거 같아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는 ‘나는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여자인 본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디자인하나요?
‘내 남편에게 입혀주고 싶은 옷’을 떠올리며 디자인해요. ‘이렇게 입으면 이 남자가 멋있어 보이겠다’ ‘이런 옷을 입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죠. 여성복 디자이너 중에도 남자가 많잖아요.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웃음)
-배우자분의 옷도 코디해 주나요?
요즘엔 바빠서 매번 남편 옷을 코디하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매일 그랬어요. 그래서 회사에서 멋쟁이라고 소문이 났었데요.(웃음)
-무상 전속 코디네이터가 있는 셈이네요.(웃음) 제일모직에서 일한지 19년이나 됐던데, 회사와 일에 대한 권태를 느끼지는 않았나요?
왜 아니겠어요. 17년차였을 때, 고민이 많았죠. 너무 오랫동안 같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저도 힘들고 회사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내린 결론이 ‘내 삶에 변화를 주자’였죠. 그래서 회사에 유학을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고맙게도 회사가 이를 받아들여서 1년 동안 유럽을 돌았어요.
-회사와의 ‘딜(deal)’이라, 엄청난 용기가 필요 했겠어요
쉽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저에겐 기회가 됐어요. 유학을 통해, 머리를 비우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었죠.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던 재충전, 발전의 시간이었어요. 한 회사를 오래 다녔고, 내가 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도 항상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해야 돼요. ‘평생 직장’이라는 것은 없거든요. 항상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키우세요. 자신이 있고 필요하다면 당당히 원하는 것을 요구도 하고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정의해주세요!
창의적 아이디어를 지닌 책임감 있는 사람이에요. 브랜드에 신선한 아이디어도 많이 제안해야 되지만, 팀원들을 조화시키고 아이디어가 브랜드와 잘 어우러지도록 요리해야 하죠. 모든 것이 다 조화롭도록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입니다.
-좋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있나요?
톰포드(Tom Ford)와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요. 각각 구찌, 루이비통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잖아요. 브랜드의 전통은 그대로 두면서 신선함을 살려 재탄생시킨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20여 년간 이어온 본인의 패션 철학이 있나요?
패션 철학이라고 하니까 너무 거창하네요.(웃음) 한 남자가 내 옷을 입었을 때, 가장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거예요. 체형이 훌륭하지 않은데, 그 사람 신체의 특징은 무시하고 유행, 이상만을 쫓아서 디자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단점을 보완하면서 그 자체로 멋있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한국 남자에게 서양 남자의 체구에 맞는 옷을 입히는 것은 곤란하죠?
그렇죠. 한국 남자의 체형, 그 자체로 가장 멋있어 보이도록 디자인하는 것! 그것이 저의 역할이에요. 한국 남자들이 가장 멋져 보이는 그날까지! 수트를 만들거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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