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시에서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고 썼다. 사람들은 보기 좋은 것에 눈길을 돌리지만 시인은 어부의 찢어진 어망과 소작인 아내의 굽은 허리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람들이 구부러진 나무를 못생겼다 말하지만 그는 그것이 토질 나쁜 땅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세기 전에 쓰인 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울림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살았던 시대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극도로 억압된 나치 시대였기에 서정시를 '쓰기' 힘들었다면, 표현의 자유가 확대됐을 뿐만 아니라 표현의 속도와 전달 방식까지 빨라진 요즘 시대는 서정시를 '읽기'힘든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슈의 유행을 선도하는 140자 트위터와 블로그, 인터넷 실시간 뉴스에 익숙해진 우리는 글다운 글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진 사회에 살고 있다. 정제된 표현과 저자의 고민이녹아있는 글보다는 자극적인 문장과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글들이 많아지고 있다.
서정시를 읽기 힘든 시대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만든다. 글다운 글을 버거워하고, 읽지 않으려하는 독자들이 많은 사회는 글다운 글을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언론을 만들고, 이는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을 등한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재생산함으로써 악순환을 낳는다. 이것이 서정시를 읽기 힘든 시대가 만드는 문제점이다.
훌륭한 글을 찾기 힘든 시대일수록 글을 쓰는 사람은 시류에 영합하기보다는 그가 글을 써야 하는 본연의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구부러진 나무의 원인을 말해주는 것, 보기 좋은 것보다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글스는 사람이 해야할 소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기자가 가져야 할 소명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누구나 1인 미디어가 되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사회, 언론 못지않게 대중의 여론이 엄청난 파급력을 갖게 된 시대에도 진실 추구와 사회의 공공선 확보라는 언론과 기자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엄청난 지원자가 몰리는 언론사 공채시험의 경쟁률과 고시시험을 준비하는 것만큼 힘들다고 해서 붙여진 '언론 고시'라는 신조어만 봐도 많은 대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언관이자 고발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 사회 공공선 확보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글다운 글을 쓰는 언론과 기자가 많아졌으면 한다. 서정시를 읽기 힘든 현실에서는 호기심과 사명감만으로는 부딪히는 일이 참 많을 것이지만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결국엔 옳은 것임을 믿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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