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기 창간멤버였던 유미자(국어국문 59졸) 동문은 55년만에 만난 숙대신보를 반가워 했다.
     

숙대신보가 55번째 생일을 맞았다. 1200호 이상이 발행된 숙대신보의 첫 모습은 어땠을까. 문득 55년 역사의 첫 막을 올린 숙대신보 제 1호의 주인공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역대 숙대신보 기자 명단을 찾아 1기 선배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50여년의 시간이 흘러 연락처가 변경된 분도 많고 작고하신 분도 있어 1기 선배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숙대신보 1기 출신인 유미자(국어국문 59졸) 동문과 연락이 닿았다. 그를 만나 숙대신보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어봤다.
- 숙대신보의 창간 과정은 어땠나요?
숙대신보는 당시 국어국문과(이하 국문과) 교수님들의 주도로 창간됐어요. 국문과 과장이셨던 이능우 교수님을 필두로, 이남덕 교수님과 김남정 교수님 그리고 시인으로도 유명하신 김남조 교수님과 국문과 학생들이 모여 숙대신보를 창간했죠.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1955년 10월에 첫 호를 발간한 기억이 나네요.
- 당시 숙대신보 발간 과정은 어땠나요?
당시는 교수님과 학생이 함께 신문을 만들었어요. 학생들이 기사를 적어가면 교수님들께서 수정을 하신 뒤에 타자기로 쳤죠. 인쇄는 교내 인쇄소에서 맡았는데, 잉크를 묻히고 활자로 찍어냈어요. 처음 창간하는 것이라 지금처럼 번듯한 편집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수님 연구실 안에 작게 마련된 곳에서 작업을 했죠. 당시의 숙대신보는 2장이었어요. 또한 한문과 국문을 혼용해서 썼는데, 교내에서 열린 연극이나 웅변대회, 운동회 같은 행사를 주로 다뤘죠. 그리고 기사 외에도 학생들이 작성한 시와 콩트 작품도 많이 실렸고, 교수님이나 총장님이 쓰신 글도 실렸어요.
-당시 숙대신보의 위상은?
처음 발간 당시 우리는 월보로 시작했죠. 단순히 학교의 소식을 전달하는 소식지의 역할만 했었어요. 처음 발행하는 거라 환경도 열악했고, 체계적이지 못했죠. 게다가 홍보가 되지 않아 학생들도 신문이 발간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어요.
-숙대신보 55주년, 축하메시지 한마디 한다면? 
처음 발간될 때는 작업환경도 열악했고, 신문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도 적었어요. 그래서 숙대신보가 계속 발간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덧 55주년을 맞이했다니 정말 감회가 새롭네요. 축하합니다. 또한 현재의 숙대신보는 부서가 나뉘어져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숙대신보가 지금의 형태로 발전한 사실이 매우 대견합니다. 앞으로 더욱 멋진 신문을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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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 최옥선(영어영문 77졸) 「주부생활」전 편집장

"언론제한 받던 70년대, 자유 찾으려 했죠"

- 그 당시에는 숙대신보가 어떻게 발간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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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부서구성은 매번 회의를 통해 조금씩 변경했어요. 당시에는 기사를 쓰지 않고 사진만 찍는 기자가 따로 있었어요. 또 전문 강사님이 계셔서 숙대신보의 디자인 감각이라든지 편집수준이 굉장히 높았어요. 전문성이 뛰어나다는 평도 들었죠. 대학 신문들 중에서도 내용에 있어서 굉장히 우수하다는 평도 들었구요. 다른 공학 대학과는 다르게 여자 대학 특유의 꼼꼼하면서도 섬세한 디자인이나 내용이 돋보인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 취재를 어떻게 했나요

그때는 전부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했어요. 지금처럼 e-mail이나 전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사람들을 직접 만나 육성으로 이야기를 듣다보면 좋은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죠. 학생이든 외부필진이든 모두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했었어요.

- 당시 학우들에게 숙대신보는 어떤 존재였나요

그 당시에는 언론매체가 많지 않았어요. 공중파 채널 수도 적었기 때문에 신문매체의 위상이 높았고 인기도 많았어요. 그만큼 대학 저널리즘의 위상도 높았죠. 당시 대학사회에서는 학내 신문을 통해 공통의 이슈를 공유하고 공존의 장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실제로 구독율이 높았고 학우들의 관심도 높았어요. 우리 신문이 이슈를 창출해내기도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창이 되기도 했죠.

- 당시 숙대신보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제가 활동하던 당시는 70년대 말 유신정부 시대였어요. 대학 신문들이 학내 학생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없는 시절이었어요. 보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에 권력제도와 싸우는 것이 중요했어요. 또한 학내 문제에 대해 단순히 기사를 작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건으로 만들어서 직접 학교 내에 돌리기도 했어요. 덕분에 저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퇴임했죠. 학내 언론의 자유를 얻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슈였어요. 비록 학생들이 만드는 신문이었기에 한계가 있었지만, 열정이 있던 시절이었죠. 저희는 거의 학보에 매달려 살았어요.

- 숙대신보 창간 55주년 축하의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그립고, 내 젊은 날의 추억과 열정이 가장 많이 담긴 곳이 숙대신보에요. 네이버와 트위터처럼 젊은이들에게 인기 많은 매체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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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기 박미정(법 95졸) 어학원 강사

"숙대신보가 러브레터로 활용돼기도 했어요"

- 그 당시에는 숙대신보가 어떻게 발간됐나요

저희 때는 컴퓨터가 없었어요. 그래서 손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원고가 완성되면 한국 경제 신문사에 가져가서 인쇄를 했죠. 인쇄도 지금처럼 기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계신 아저씨들께서 조판 활자를 일일이 찾아서 찍어주셨어요. '숙'이라는 글자를 인쇄하려면 'ㅅ'과 'ㅜ', 'ㄱ'을 찾아 조합하는 식이었어요.

- 취재는 어떻게 했나요

기자별로 부서를 맡아 직접 찾아 다녔어요. 총학생회와 동아리, 각 학과 등 분야를 주기별로 찾아가서 취재거리를 모았죠. 어떤 기사든지 항상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기록한대로 썼어요.

- 당시 학우들에게 숙대신보는 어떤 존재였나요

러브레터 역할을 했어요.(웃음) 학생들이 숙대신보를 우편함에 들어갈 많나 크기로 접고, 그 사이에 편지를 끼워 다른 학보사로 보내곤 했죠. 다른 학교 신문도 그렇게 활용 했어요. 핸드폰은 커녕 삐삐도 없던 시대라서 학보를 주고받으며 친구를 만들었죠.

- 당시 숙대신보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데모가 많았던 때라 취재를 할 때 힘들었죠. 한 번은 당시 빨갱이라고 단속됐던 '남한 사회주의 노동장 동맹'이라는 단체의 정보를 입수하게 돼 파고다 공원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런데 전경들이 단속을 나와서 도망을 가다가 가방을 잃어버렸죠. 그 가방에는 제 신분증과 숙대신보사 단체 사진, '남한 사회주의 노동장 동맹'의 소식지부터 취재 수첩까지 들어있었어요. 다음날 전경이 그 가방을 경찰로 넘기겠다며 연락을 해왔죠. 그래서 숙대신보사 친구들과 평소에 잘 입지도 않던 미니스커트를 입고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전경을 찾아갔어요.(웃음) 겨우 설특하고 가방을 찾아왔죠. 그 때는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 숙대신보 창간 55주년 축하의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가장 많은 열정을 바친 숙대신보사가 55주년을 맞이했다니 정말 기쁘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숙대신보를 만들었던 선배로서 후배들이 일에만 치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을 즐길 줄 아는 기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대학 신문인만큼 사회적인 면과 학술적인 면의 공존이 이루어져 더욱 발전하는 신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 60주년 쯤 되었을 때 모든 기수가 크게 모임을 한 번 가졌으면 해요. 100주년까지 가면 제가 나이가 들어 안될 것 같아서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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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기 서소정(국어국문 06졸) 아시아 경제신문 기자

"박근혜의원 인터뷰한게 가장 기억에 남죠"

- 그 당시에는 숙대신보가 어떻게 발간됐나요

월요일부터 목요일 오전까지는 취재를 했고, 목요일 오후부터 기사작성을 해서 금요일 오전에 마감했어요. 기사가 완성되면 신문지면 디자인을 시작했죠. 이 작업이 길어져서 금요일 밤 10시 이후까지 작업을 했고, 때로는 밤을 새기도 했어요. 토요일이 돼 각 지면의 레이아웃 작업이 끝나고 최종본이 완성되면, 충무로에 있는 인쇄소에 가서 신문작업을 마무리 했어요.

- 취재는 어떻게 했나요

지금과 비슷하게 취재부, 여성부, 사회부, 문화부로 나눠서 관련된 아이템을 구해 기사를 썼죠. 저희 때는 대학 신문인만큼 학술적인 부분도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해 학술부를 신설했어요. 취재는 학 내의 게시판이나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기사가 될 만한 것을 찾거나 때로는 신보사 전화나 메일로 제보를 받기도 했고요. 방학 때는 서울대, 고려대 등 다른 학교 신문사들과 교류하면서 공통된 대학 이슈 등을 발굴하곤 했죠.

- 당시 학우들에게 숙대신보는 어떤 존재였나요

월요일 오전에 신문이 배포되면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가면서 숙대신보를 챙겨 가곤 했어요. 오후가 되면 서관(현재 명신관) 앞이나 본관(현재 순헌관) 앞에 놓인 신문들이 동이 나곤 했죠. 많은 학우들이 숙대신보를 통해 학교소식을 듣고 교내행사에 참여했어요.

- 당시 숙대신보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을 만나 여성 정치인으로서 포부를 들었던 것과 국내 최초 여성 경찰서장을 지낸 김강자 총경을 만나 당시 논란의 중심이었던 공창제에 대한 의견을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특히 숙대신보는 다른 학교 신문과 달리 '여성면'이 따로 있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이슈 등을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점이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 숙대신보의 창간 55주년 축하의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숙대신보 창간 5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졸업 후 기자로 일하고 있어 숙대신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경험이 큰 자산이 되요. 특히 언론사를 목표로 하는 후배라면 숙대신보 활동을 더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앞으로 숙대신보가 기성언론과 차별화된 20대 대학생만의 참신하고 날카로운 시각이 담긴 신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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