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희연(선일여자고등학교)

사라지는 것

“에휴…….”
어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
어린 나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전화벨이 울려주었으면, 속으로 간절히 빈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알라신…….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하느라 나의 머릿속은 안쓰럽게도 포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기도가 무색하게, 나의 몇 안되는 친구들에게는 전화 한 통도 오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더 세게 움켜잡는다. 방금 전 읽었던 구절을 몇 번이고 되새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어린 왕자’의 붉은 장미를 떠올린다. 문득 나도 ‘어린 왕자’의 아무 대목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단 생각을 한다. 그래, 여덟 살의 나는 지금 너무도 외롭다.
지금보다 더 어리던 시절, 그러니까 내가 낯선 곳에 앉아 처음으로 ‘말하기듣기’, ‘읽기쓰기’, ‘바른 생활’ 같은 정식 교과목을 배울 무렵, 나는 벌써부터 ‘혼자’라는 단어를 친숙히 여기고 있었다. 워낙에 소극적이었고, 내성적이었으며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공포증까지 있었으니 아무도 쉽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누군가 내 앞에 있으면 긴장해서 그런지 잘 웃지도 않았다. 후에 여차여차해 친해진 친구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그 때 네가 잔뜩 화가 난 줄 알았지!”
이렇게 인상 쓰기의 달인이었으니, 붙어 다닐 친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의 하루 일과는 전국 수석의 그것처럼 매우 모범적이고 간단했다.
집-학교-집. 외출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학업에 매진했다면 지금쯤 나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전국의 공부벌레들 사이에서 수줍지만 위풍당당한 미소를 만면에 띠우며 해맑게 김-치이를 외쳤을 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초등학생이었고, 지극히 평범하게 학교 종이 땡땡땡 치면 교과서와 안녕을 고했다.
글쎄,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부터 집에 있던 책을 모조리 읽어버렸다는 것?
언제부터였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끝없이 밀려드는 지루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일 집에 틀어박혀 공상만 하고 있던 나를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잔소리와 한숨 소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조그맣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저 다른 세계로 도망치고 싶었다.
물결치는 새로움과 저릿한 교훈, 내가 굳이 말을 걸지 않아도 책은 스스럼없이 자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으면 될 뿐이었다. 어색한 첫 만남 속에서 낯부끄러운 인사말을 나누지 않아도 되고, 자기 자신을 포장할 필요도, 속일 필요도 없었다. 책이 말해주는 무궁무진한 새로운 세계 속에 빠지는 것은 너무도 행복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책은 내게 어떤 종류의 ‘치유’를 해주었다. 그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나는 어린 코흘리개일 뿐이었으나 나름대로 상처도 고민도 많았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에서 비롯되는 자책감, 활발하고 리더십 있어 인기 좋은 쌍둥이 오빠에 대한 열등감, 여자라는 이유로 괜히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은근한 차별을 받을 때의 무력감. 그 모든 것을 나는 책, 즉 문학으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심리학 박사가 쓴 수필들 속 나의 모습을 찾아내어 그 공감과 고마움에 나의 마음은 치유되었고, 낡아빠진 시집들 속에 겨우 두 줄 밖에 안되는 시에 매료되어 나의 마음은 치유되었고, 심지어 추리소설을 보아도 주인공의 따뜻한 마음에 치유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참 쉽게 물들어버리는 사람이지만 이 때 내가 힘들어하는 일이 있을 적마다 나를 위로해주는 문학이 너무나도 좋았다. 문학을 읽을 때 나는 내가 조금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나도 이렇게 글을 써 누군가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곳 정반대편에 사는 사람이 나의 영향을 받고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나는 매일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의 세상, 사람들에게 문학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중요하지 않았나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문학이 사라져버리고 첨단산업과 과학 기술만이 도래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듣고 난 직후, 나는 너무도 의아했다.
‘그럼 사람 마음은 도대체 누가 치유해줘?’
내 또래의 친구들도 나의 꿈이 소설가라고 말하면 대번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인다.
“왜? 돈도 잘 못 벌잖아”
이런 엇비슷한 말을 들을 때, 나는 정말 문학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울해지곤 했다.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면 저렇게 말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몰래 나의 습작소설을 내 비밀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것을 우연히 본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나는 쥐구멍에 숨고만 싶을 만큼 너무도 부끄러웠다.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주제였던 그 소설을 보고 내 친구는 이렇게 신랄하게 비웃을 것만 같았다.
“야! 너 이런 것도 쓰냐? 어후~ 닭살 돋아, 정말”
원래 좀 냉소적이고 까칠한 녀석이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탓에 나는 며칠 동안 녀석을 피해 다녔고 마주쳐도 얼른 지나쳐버리기 일쑤였다.
그러자 그 낌새를 눈치 챘는지 녀석은 날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이러는 것이 아닌가.
“너 왜 그래. 소설 본 것 때문에 그래? 난 엄청 감동 받았는데. 잘 쓰던데? 앞으로 감동 탁이라고 불러야겠어”
그 때의 그 멍함, 그러나 너무 행복했다. 단지 그가 나의 소설을 잘 썼다고 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이고 어색해지는 분위기가 싫어 칭찬 한 번 해주지 않던 녀석이 내 소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에 기뻤다. 무언가를 느꼈다는 것이 너무도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래,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이다. 진화하지 않으면 깜빡 뭍혀버릴 수도 있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감성, 위로, 치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누군가를 따스히 보듬어주고 달래주는 문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겪었던 일은 어쩌면 누군가는 코웃음칠 정도로 보잘 것 없을 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쓴 소설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 자체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하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기도한다. 언젠가 내가 다수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내가 받았던 위로를 다시 누군가에게 베풀날이 오기를.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는 날이 이어진다면 그 자체로 문학은 영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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