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유희로 탐색하는 제 3의 방
-함기석 『뽈랑 공원』, 오은 『호텔 타셀의 돼지들』을 중심으로

서현동(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언어유희(言語遊戱)란 동음이의어나 각운 등을 이용하여 재미있게 꾸미는 말의 표현을 의미한다. 내포된 의미와 더불어 모형적인 재미를 주는 것을 기반으로 효과적인 문학의 기법으로 쓰여 왔다.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던 역설적인 보수성이 붕괴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세워짐에 따라 문학의 변형은 자유로워졌다. 언어유희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경계를 구분 짓는 중요한 표현법이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 일컫는 난해성 짙은 문학의 근본은 기호와 기표를 숨기는 것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독자는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태도는 시가 기의의 세계이기 이전에 기표의 세계로 존재한다고 믿는 데에서 온다. 언어유희를 이용한 모든 시는 전후의 문맥이나 상황에 따라서 가변적인 지시 대상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유희는 의미작용의 불안정성이 바로 언어기호의 본질임을 주장하는 후기 구조주의와도 관계가 있다.
의미를 내포하기 위해 또 한 번 언어에 포장을 하는 텍스트들이 그 관계를 갖는 텍스트가 된다.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표방하고 언어의 실험성을 염두에 두어 신선함을 평가받았던 함기석의 『뽈랑 공원』(2008, 랜덤하우스)와 오은의 『호텔 타셀의 돼지들』(2009, 민음사)가 다루고자 하는 텍스트이다. 달아나는 언어들의 텍스트에 맞춰 현대 문예사조의 새로운 목차가 되어가고 있는 현대 시인들의 발상과 기법을 언어유희로 비추어보고 근본적으로 언어유희의 기법의 순기능과 다변적인 측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언어들의 제국 ‘뽈랑 공원’

함기석의 세 번째 시집 『뽈랑 공원』에서는, 이 세상에 없는 제3세계를 새로운 언어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테면 f(x)라는 함수에서 x에 넣는 숫자와 수식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것처럼 시라는 틀 속에 새로운 언어를 대입한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에 대한 시평에서는 ‘발명의 시다. 운율이나, 언어 사용, 시 장르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천착이 모두 남다르다. 한국 시사를 둘러봐도 이만한 발명은 드물다. 함기석의 언어는 야콥슨의 도표 중 지시 기능과 친교 기능을 절대적으로 배반한다. 그는 시적 기능과 메타 언어적 기능을 주로 쓰지만 그것마저도 끝없이 의심한다.’라고 평가한다. 언어의 제국을 건설하고 자유로운 시쓰기로 새로운 실험정신을 보여준 함기석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1행이 걸어간다 해바라기 꽃길 따라
2행이 걸어간다 시냇물따라
3행이 걸어간다 겅중겅중 걸어간다
4행이 걸어간다 악기들과 걸어간다
5행이 걸어간다 콧노래 부르며 걸어간다
6행이 걸어간다 발 달린 가을도 걸어간다
7행이 걸어간다 하늘을 와삭와삭 베어먹으며
8행이 걸어간다 사과나무 걸어간다
9행이 걸어간다 포도나무 걸어간다
- 함기석『즐거운 소풍』

시의 태반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새로운 형식의 시이다. 언어유희라고 정의되던 형식적인 말놀이는 아니지만, 시의 구조를 노출시키면서 다양한 소재들을 인의 적으로 사용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어유희에서 정의한 부분 가운데 이 시는 모형적인 재미를 가져다준다. 실제로 시 속에서 행과 연 구분을 자유롭게 하여 이를테면 ‘나무 모양, 별모양’등의 시를 쓴 기존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9행으로 된 작품으로 1~9라는 숫자의 연속적 배열로 계단의 층계 같은 이미지를 준다. 제목의 소풍처럼 자유롭고 즐거운 이미지의 배열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게 들어내고 있는 시다.

내가 편의점 앞 1행을 지날 때 하늘엔 노란 택시
내가 미용실 옆 2행을 지날 때 떠다니는 나무들
내가 교차로 뒤 3행을 지날 때 날아가는 사람들
(후략)
-『말과 섹스 하는 남자』중에서

말과 섹스를 한다는 파격적인 모태를 품고 이 시는 지나가 듯 흘러간다. 화자는 미로를 지난다. 1행, 2행, 3행으로 구분되어지는 길, ‘즐거운 소풍’처럼 숫자와 언어의 순차적인 배열을 통해 의식의 흐름을 전달하지만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화자인 ‘나’를 통해 창작의 고통을 표출하는 주제를 담아낸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한자어를 쓰지 않을 때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의사소통을 위해 인간이 쓰는 말인지, 포유류과 동물의 말인지 등의 여러 가지 해석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함기석의 시는 이렇게 가벼운 언어유희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석은 독자의 몫이 되며 1:1 방향으로 퀴즈를 풀고 맞히는 형식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언어의 숨겨진 의미와 외형적인 유희를 통해 시인은 또 하나의 제국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독자는 스스로 제국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참여한다. 참여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소통되는 것이야 말로 언어유희의 또 다른 기능으로 문학사에 자리 잡는다. 작가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야말로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문학의 1차원적인 기능에서 탈피한 새로운 형식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가히 실험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 없다.

코코는 월요일에 뽈롤롱을 맛있게 먹는다
코코는 화요일에 뽈롤롱에서 낮잠을 잔다
코코는 수요일에 뽈롤롱까지 자전거를 탄다
코코는 목요일에 뽈롤롱과 수영을 한다
코코는 금요일에 뽈롤롱을 들으며 요가를 한다
코코는 토요일에 뽈롤롱을 만지며 수음 한다
코코는 일요일에 뽈롤롱이 나오는 만화영화를 본다
코코는 풍요일에 뽈롤롱 타고 나를 찾아온다

- 『뽈롤롱』

때로는 작가의 일방적인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뽈랑 공원’이라는 제국의 탄생은 일방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보편적인 소통과 시편마다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지만, 이곳은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뽈롤롱’과 같은 시는 언어의 새로운 창조물로서 ‘코코’라는 화자가 먹고, 자고, 타고, 하는 동작에서 없으면 안 되는 지배적인 시어로 보인다. ‘뽈롤롱’이라는 단어를 보면 계산적이지 않고 순간적인 의식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말처럼 생소하다. 작가의 계산에 없는 단어라면 독자는 일방적인 태도를 느끼고 불쾌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된 단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또 한 번 제국에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폴랑 공원’이라는 시를 보면 낯설고 아방가르드적인 세계에서 어떤 의미의 단어들로 책갈피를 두지 않는지 표현되어 있다.

뽈랑색 벤치들이 보인다
뽈랑새 두 마리 자유로이 공원을 날고 있다
(중략)
이상하게 생긴 뽈랑 빗자루로 공원을 쓴다
그러자 공원이 조금씩 조금씩 지워지면서
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중략)
말들이 피운다는 뽈랑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책을 펼친다
20페이지에 뽈랑 공원이 나타난다
함기석이라는 휴지통이 보인다
여백이 되어버린 하늘이 보인다
(후략)

- 『뽈랑 공원』 중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쉬운 제국에서 ‘뽈랑’이라는 말은 그들의 모국어처럼 사용 된다. 뽈랑색 벤치와 뽈랑새 두 마리, 뽈랑 빗자루와 뽈랑 담배를 품는 뽈랑 공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제국은 언어유희의 포화를 이루는 재미있는 도시가 된다. 의미가 없는 시어를 통해 의미로 과포화 되고 정의로 빼곡한 현실을 도피하는 기능을 한다. 이 제국의 탄생을 근원적으로 의미화 한다면 존재로서의 의미도 망각하겠지만, 사라지고 나타남의 자유로운 이미지를 통해 의미 없는 이유를 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젤로 보고 싶은 젤로 오늘 밤 갈 거예요 접시 타고 갈거예요 숟가락 타고 갈 거예요 젤로 아픈 젤로 딸기를 좋아하는 젤로 조금만 기다리세요 딸기밭을 번쩍 들고 갈거예요
-『미켈란이 젤로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

미켈란젤로에서 파생된 두 인물에 관한 내용이다. 화자는 미켈란이 되고 젤로는 화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젤로라는 인물이다. 단순히 미켈란젤로에서 미켈란과 젤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젤로는 ‘제일로’라는 현대적으로 사용되는 언어함축의 근본적인 예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는 약 80byte로 제한되어있어 사람들은 말의 함축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더한다. 그런 현대 문명의 실태를 반영한 세밀하고도 정밀한 관찰력이 보이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젤로 아픈 젤로 딸기를 좋아하는’이라는 표현에서는 문장 속에서 겹치기가 눈에 선명하다. 해석한 대로라면 ‘제일로 아픈 젤로, 딸기를 좋아하는’이 될 수 있고 ‘제일로 아픈 제일로 딸기를 좋아하는’으로도 해석 될 수 있다.
독자의 표면적인 수용 태도에 새로운 텍스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은 신선한 언어들의 실험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기표와 기의 사의에 존재하는 간극에는 유희라는 공간이 지배적으로 생겨난다. 지배적으로 생겨난 공간 속에서 ‘뽈랑 공원’이 생기고 그 속에서 ‘뽈랑’으로 매듭지어지는 환상적인 소재들은 언어유희의 1차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은어와 같은 기능을 주게 된다. 우리끼리 알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언어유희의 기능이 현대문학에서 점점 확대되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의 문학이 발견에 의지하며 새로움이라는 인식을 고무적으로 생각해왔다면 문학적 발명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 것이 함기석 시인의 작품이다. 기존의 현실을 등지고 누구나 접해보지 못했던 환상의 세계를 모방하는 일명 탈脫미메시스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파생의 경험을 시를 통해 드러낸다.

2. 말놀이로 도달하는 언어의 생장점 ‘호텔 타셀의 돼지들’

모스크 바(bar)에 가자 모스크 바에 가면 당대 최고의 가수 빅토르 최를 만날 수 있다 제네 바의 가수는 항상 하이디, 그녀는 요들송만 부른다 바르샤 바의 술값은 너무 비싸 위스키 한 잔에 이스탄 불(dollar)을 내야 한다 이쯤 되면 우리가 모스크 바에 가는 것은 당연해진다 모스크 바에 가기 위해선 우선 차가 있어야 한다 카사블랑 카(car)나 알래스 카보다는 니스 칠이 되어 있는 스리랑 카를 추천한다 스리랑 카를 타고 오슬 로(path)를 따라가다 보면 암스테르 담(fence)이 나온다 거기서 이사 벨(bell)을 누르면 십중팔구 세 명의 브레 맨(men)이 나올 것이다 (후략)

- 오은 『말놀이 에드리브』중에서

언어의 지구본을 돌리는 이 작품은 오은이 추구하는 말놀이의 극치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지명으로 쓰이는 세계의 언어를 한국어로 읽는 새로운 형식의 말놀이는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재미있는 요소를 제공한다. 창조되는 언어유희보다 기존에 다뤄진 형식으로 더 많은 눈동자를 가지고 바라본다는 점에서 오은의 시집은 언어유희의 과정 속에 집합한 커다란 생장점을 드러낸다.
‘말놀이 애드리브’란 명칭은 단순히 말놀이로 한정되지 않는다. 저 명칭을 말놀이의 일종인 새말 짓기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한정은 한국어의 타자(“애드리브”)를 은연중에 스며들게 하는 저 말의 구성방식이 지닌 가능성을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놀이가 그러하듯 저 말놀이 또한 일상적 규범들의 구속력을 느슨하게 하면서, 말의 판이 바뀔 수 있는 변형지대의 형성에 기여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변형지대로서의 말놀이터에서 일어나는 것은 단순히 낱말 하나의 추가가 아니다. 거기에서는 한국어가 성벽을 쌓아 막으려 했던 타자들의 출입이 이루어지고, 또 우리의 사고체계가 감추고 있던 추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오은의 특이한 시작 방식이 보유한 가능성과 영향력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분명 이미 자연처럼 주어진 언어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이고, 더 나아가서는 언어 자체를 벗어나 언어의 바깥에 있는 존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언어유희가 주는 아이러니한 비극을 한 단락의 길고 짧은 서사로 풀어내는 방법으로 그려나가는 여러 시편 들 가운데 노골적인 시가 바로 ‘말놀이 애드리브’이다. 그리고 한국적인 정서로 뿜어내는 말놀이의 또 다른 유형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살펴볼 수 있다.

어떤 날엔 눈만 감아도 석자 코가 썩썩 잘려 나갔다 무심코 돌다리를 두드렸다가 핑계 없는 무덤에 매장되기도 했다 아니 땐 굴뚝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매연을 뿜었다 학교에서는 낫을 놓고 L자라고 가르쳤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었지만 기는 놈만큼 생존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뛰어 봤자 벼룩이었고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3』

이 작품은 한국의 전래되어오는 속담을 가지고 풀어 쓴 작품이다. 단순한 재미와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이 아닌, 침착한 현실을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주목한다. ‘학교에서는 낫을 놓고 L자라고 가르쳤다’라는 부분이 말하는 현실 교육에 대한 꼬집기, ‘기는 놈만큼 생존력이 강하지는 않았다’라는 부분이 말하는 사회생활에서 주관이 없는 아부쟁이들에 대한 꼬집기, ‘가제가 게를 배신했다’라는 부분이 말하는 믿음이 결핍된 인간의 변화되어온 본질(무정)을 꼬집기 등 복합적으로 엉켜있는 언어유희를 통해 꼬집는 부분들이 독자에게 주는 하나의 선물이 된다.
시인이 가지는 비평의식은 시에 있어서 풍자의 미학을 보여준다. 문학 용어 사전에 의하면 풍자란 어떤 주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거기에 대한 재미, 멸시, 분노, 냉소 등의 태도를 환기시킴으로써 그것을 격하시키는 문학적 기법을 말한다. 언어유희적인 시의 구성을 바탕으로 도태하는 문제들을 짓밟는 오은의 태도는 도발적이고 발칙하지만, 다시 언어유희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뻔뻔함은 날카로운 지적을 극대화시켜 부드럽게 전달한다.
속담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반의어, 동음이의어, 관용구를 이용한 언어유희들도 흘러나온다. 오은이 펴내는 시들 속엔 낯설게 하기의 계산적인 소재들이 풍성하게 자리 잡는다. ‘This hoffman' '제인’ ‘한스’와 같은 시편들은 시적화자의 이름을 외국이름으로 불러주어 이야기 속 배경과 사건을 낯설게 하는 기법으로 속임수를 쓴다. 한국어가 낯설어지는 것은 제목으로 정의한 말놀이가 이 시집의 끝을 도달하는 양상을 비춘다.

느닷없이 접촉사고
느닷없이 삼각관계
느닷없이 시기질투
느닷없이 풍전등화
느닷없이 수호천사
느닷없이 재벌2세
느닷없이 신데렐라
느닷없이 승승장구
느닷없이 이복형제
느닷없이 행방불명
느닷없이 폐암진단
느닷없이 양심고백
느닷없이 눈물바다
느닷없이 무사귀환
느닷없이 갈등해소
느닷없이 해피엔딩

16부작이 끝났습니다
꿈 깰 시간입니다

-『미니시리즈』

문화적인 양상을 반영한 ‘미니시리즈’라는 작품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어구처럼 어쩌면 느닷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시조의 운율처럼, 4.4의 운율로 반복되는 이 작품은 천편일률적으로 뻔 한 요즘 드라마를 꼬집고 있다. 개연성 없는 사건들의 등장에 대해서 작가는 ‘꿈 깰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를 비롯해 오은이 언어유희를 통해 꼬집는 것은 일명 앙시앵레짐ancien r?gime의 경향으로 사회를 응시한다. 낯설고 새로운 낱말들을 통해서 낡은 체제를 붕괴하고 싶은 시인의 욕망으로 볼 수 있다. 독자는 하나의 시민이고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갖는다. 시를 쓰는 작가 역시 하나의 국민으로서 이야기 한다. 확성기가 없는 외침처럼 혼잣말로 끝날 수도 있는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언어유희의 기능은 간극으로 벌어진 문학과 독자 사이를 끌어당긴다. 끌어당김 속에 사회는 하나의 공통된 소재가 되어 읽히고 쓰여진다. 단순한 재미에서 벗어나 오은의 시집이 전달하는 편지의 우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냥 제인을 제인으로 받아들여. 제인은 당신이 [제인]으로 불러 주길 원하고 있어. [d??in]도 아니고 [줴인]도 아니야, [죄인]은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 억지로 혀를 굴려 스스로를 모욕할 필욘 없잖아. (중략) 오늘도 나는 여전히 이름이 제인인 한 친구를 알고 있어. 그리고 제인은, 더 이상 네가 아는 그 제인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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