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여성 노숙인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서계동에 위치한 여성상담보호센터 ‘우리들의 좋은 집’을 찾아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굽이진 골목을 걷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고서야 ‘우리들의 좋은 집’ 팻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겨우 한명이 지나갈 만한 좁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억지로 신발을 구겨 넣은 듯한 신발장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구겨 넣는 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몇몇 신발들은 밖에 나와 비를 맞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부스스한 머리에 헐렁한 옷차림을 한 여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이라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기자의 모습을 본 그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우리들의 좋은 집’은 여성 노숙인에게 잠시 거처를 제공하면서 목적에 맞는 쉼터나 일자리를 찾아주는 중계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가정 폭력이나 경제파탄과 같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노숙 위기에 처했거나, 거리 노숙을 하다 경찰이 발견해 이곳으로 옮겨온 여성들이다. 그들이 이곳에 오면 약 한달 가량 전문 상담원을 통해 자활 상담을 받은 후 쉼터와 같은 보호시설로 다시 이동한다.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문정우씨는 ‘우리들의 좋은 집’을 다녀간 사람 수가 지난 2006년에는 180여 명, 동일인을 따지지 않고 계산했을 때 약 4,300명이라고 전했다. 매일 12명 정도의 노숙인들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셈이다. 이 날 역시 10명이 넘는 여성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현재 서울 시내의 여성 노숙인은 5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쉼터에 입소한 여성, 거리 노숙 여성, 그 외 복지시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여성 노숙인을 포함한 수치다. 그리고 여성 노숙인은 해가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여성 노숙인이 점점 늘어나는 데에는 각기 나름의 사연이 있다. 남성 노숙의 원인은 대부분 경제적 빈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여성 노숙의 원인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하다. 문씨는 “여성 노숙의 가장 큰 원인은 가정 폭력이다. 남편에게 학대받은 여성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가정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정신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여성은 가정에서 부양을 포기하는 경우 노숙을 하게 된다.”고 전했다. 실제로 기자가 서울역에서 마주친 여성 노숙인 중 대부분은 대화가 가능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지체를 앓고 있었다.


마음의 상처와 건강상 문제를 안은 채 거리로 나선 여성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길거리 여성 노숙인의 경우 성범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여성 노숙인들은 종종 취객이나 남성 노숙자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지만 마땅히 보호받을 곳이 없다. 그들에 대한 관리체계도 미흡하기 때문에 피해에 대해 호소할 길이 없는 상태다. 그래도 특별한 질환이 없는 여성 노숙인은 스스로 보호시설을 찾아 중절 수술을 받기도 하므로 상황이 조금 낫다. 그러나 정신지체 여성은 강간을 당한 후 임신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중절 시기를 놓쳐 출산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차원에서 미혼모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출산한 여성 노숙인이 주민등록 상 혼인신고가 된 경우는 수용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여성이 아이를 동반해 노숙하는 ‘모자 노숙’이 급증하고 있다. 숙식과 함께 양육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여성 노숙인 혼자의 힘으로는 너무나 벅찬 일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지원은 매우 미미하다. 현재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남성 노숙인 쉼터는 서울 지역에만 50여 개인 반면 여성 노숙인 쉼터는 서너 개에 불과하다. 국가가 관리하는 쉼터 역시 환경이 낙후됐거나 지원금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많은 여성 노숙인을 수용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치료 프로그램이나 재활 프로그램이 있을 리 만무하다. 문씨는 “‘우리들의 좋은 집’ 조차 정식 인가가 나지 않아 쉼터에 나오는 지원금을 할당받아 쓰는 중”이라며 운영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방문을 열었더니 한데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 열 명 남짓한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극히 꺼려하는 터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서 처음과 같은 경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은 또 어디에서 몸을 뉘고 있을지 못내 걱정이 돼 한 번 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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