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직업여성, 골드미스였을까?
과거에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때에도 스스로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는 전문 직업여성이 있었다. 궁녀, 의녀가 바로 그들이다.
궁녀는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존재해왔다. 이들은 일생동안을 궁 안에서 생활했지만 가족의 생계유지와 후궁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고된 생활을 견뎌냈다. 궁녀들은 궁 예절에 대한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어린 궁녀들에게 은밀히 행해지는 교육이 있었다. ‘쥐부리글려’라고 불리는 이 교육은 궁녀에게 말조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었다. 먼저 어린 궁녀들의 입에 흰 무명천을 씌운다. 그러면 내관들이 불을 붙인 장대를 궁녀들 입 주위로 휘두르며 입을 지지는 흉내를 낸다. 이때, 내관들이 어린 궁녀들에게 “쥐부리지져”라며 위협을 했다.
의녀도 과거의 전문직 여성으로 태종 때부터 남성의원의 진료를 기피하는 여성들을 위해 일 해왔다. 이들은 의료 활동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여성이 낙태했는가를 조사하기도 하고, 여성 죄인에게 사약을 내릴 때도 파견됐으며 궁중이나 사대부가 여성에 관한 범죄를 수사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기녀를 대신해 궁중연회에 동원돼 약방기생이라고도 불렸다.
우리 학교 한희숙(역사문화학 전공) 교수는 “직업여성들은 과거에 여성의 역할이 필요한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 기능을 갖춰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천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천시됐어요”고 말했다. 현대의 전문직 여성들은 골드미스로 찬양받고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산다. 이에 비해 과거 전문 직업여성들은 너무 가혹한 현실을 살았던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얼굴 드러내고 외출하면 볼기 50대?
조선시대에는 내외법에 의해 여자들이 꽃놀이를 가면 곤장 100대를 맞았다. 유가의 경전인 「예기」를 살펴보면 ‘남자는 함부로 내당에 들지 않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등 내외를 엄격히 구분하고 여성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문밖출입을 할 때 반드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세종 8년, 김포현령 이효지 부인 유씨는 얼굴을 가리지 않고 외출했다가 볼기 50대에 맞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논란이 돼왔던 여성들의 바깥구경금지는 선조 대에 오면서 완전히 금지된다.
바깥놀이가 법으로 금지되면서 여성들은 집안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특이한 놀이로 동전 굴리기가 있는데, 바람난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들이 적적한 밤을 지새우기 위해 즐겨했다고 한다. 이런 여성들도 특별한 날에는 밖에서 공동놀이를 하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에는 동네 여자들끼리 모여 신분, 나이를 따지지 않고 놋다리밟기를 하고, 팔월 한가위에는 강강술래놀이를 했다.
여성들은 제한된 생활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놀이를 찾아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여성에게 억압을 주었던 내외법이 오히려 여성들만의 새로운 놀이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교 사상 벗고 여왕 통치 바라보면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총 3명의 여왕이 존재한다. 모두 신라시대의 왕이었던 이들은 성별보다는 신분을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 신라의 분위기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선견지명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란꽃 일화’ 등에서 나타나는 이것은 여왕의 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 신라를 통일의 주역으로 성장시키는 토대를 닦았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도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당나라와 친선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은 무능하고 음탕해 신라의 멸망을 재촉한 왕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유교사상을 따르는「삼국사기」의 여성비하적인 태도가 담겨 지나치게 묘사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진성여왕 2년, 여왕이 미소년들을 측근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겼다고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여왕이 화랑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려던 의도였다.
후대 유교사가들은 여왕들에 대해 다른 왕보다 더욱 가혹한 평가를 내리곤 했다. 하지만 지혜를 발휘해 유연하게 국가적 위기를 풀어나가려 한 그녀들은 어느 시대 여느 왕과 다를 바가 없는 한 나라의 왕이었다.


여성의 유일한 분출구, 굿판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행해졌던 무속신앙. 무속신앙은 이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갈등을 풀어주기도 했다. 굿판에서 죽은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며느리가 한풀이를 할 때, 모인 사람들은 고부간으로 편이 나뉘어 다투게 된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 풀어질 무렵, 편이 나뉘어져 있던 사람들도 결국 화해를 한다. 무속을 통해 서로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가족의 평화를 기리는 것이다.
이런 무속신앙은 춤을 추며 쌓인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기도 했다. 굿에는 굿판에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는 무감이라는 순서가 있다. 이는 춤을 추면서 여성들의 갈등과 한, 고통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여성들은 이런 무감을 통해 일상생활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희숙 교수는 “무속은 과거에 비중 있는 종교로써 사람들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해줬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더 무속에 의지하는 경향을 보였는데요. 남성들의 경우는 유교 교육을 받으면서 무속을 배척하고, 지식인으로서 자기 관리 능력을 향상시켜 온데 비해, 가정을 우주로 삼고 평생을 살았던 여성들은 심리적 고통을 해결할 다른 방도가 딱히 없었기 때문입니다”고 말했다. 남성중심의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항상 사회적 약자였다. 그 속에서 무속은 약자의 편에서 한을 풀어줌으로써 여성들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비과학적이라며 현대에 와서는 비판을 받는 무속신앙. 여성의 한을 풀어주며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 온 무속을 이제는 새로운 시선으로 봐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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