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자(숙전 기예 42졸) 동문

사진출처 = 학교홈페이지

지난 5월 22일 숙명여자대학교는 창학 103주년을 맞았다. 우리 학교는 순헌황귀비의 명으로 1906년에 설립된 명신여학교를 기반으로, 숙명여자전문학교(1938.12~1948.05)를 거쳐 지금의 숙명여자대학교로 발전했다. 약 60여년 전 우리학교 전신 숙명여자전문학교(이하 숙전)의 모습을 전해 듣고자 이영자 동문(숙전 기예과, 42졸)을 만나봤다.

숙전이었던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지금의 숙명여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 동문은 고향인 황해도에서 해주여고를 졸업한 뒤 우리학교에 대해 긍정적인 사회인식에 영향을 받아 숙전입학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숙전은 다른 학교에 비해 경쟁률이 높았고, 추천서가 있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창기 숙전의 학과는 3년학제인 본과와 1년학제인 전수과가 있었다. 본과는 다시 가정과와 기예과로 분류됐으며, 본과의 경우 여성의 전인교육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다루었다. 가정과는 주로 가사과목의 이론과 실습이 수업의 주를 이뤘으며, 물리 화학 생물 등 이과계통의 과목도 교육했다. 이 동문이 전공한 기예과는 가정과와 교육과정이 유사했으나 수예교과가 훨씬 다양하게 이뤄졌다고 한다.

한편, 당시 여성교육기관 중에서도 으뜸이었던 숙전 역시 일제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교원 중 한국인 교원은 절반도 되지 않았고, 국어 시간에는 일본어를 가르쳤다. 우리 말은 조선어라는 별도의 과목으로 제2외국어처럼 가르쳤는데, 이 동문은 “일제치하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라며 어두웠던 그 시절을 안타까워했다.

숙명인, 시대의 앞선 여성으로 살다

이 동문은 어떤 대학생활을 했을까. 이 동문은 “나와 함께 수업을 들었던 동기들은 약 30명정도였지. 다함께 계단식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이 서울로 유학을 와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학생들이 다함께 식사를 준비했어. 물론 빨래와 기숙사 청소도 우리 손으로 해결했지”라고 말했다.

이 동문은 “내가 숙전에 입학했을 때, 우리 동네에서 전문학교를 간 여자는 나뿐이었어”라며 여성교육에 대한 당시 사회분위기를 말했다. 여자가 교육받는 일이 흔치 않던 시절에 이 동문은 어떻게 숙명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이 동문은 ‘교육’을 중시했던 가풍과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어머니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집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어. 내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내 어머니의 영향이 컸지”라고 말했다. 이 동문의 어머니는 ‘여자도 교육을 꼭 받아야 한다’며 보통학교 시절에는 그에게 한자와 산수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동문은 숙전 졸업 후 교사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는 광복이전이라 한국인이 학교의 교사가 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교사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여러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했어”라고 말했다. 복잡했던 절차에는 보증인이 필요했는데,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던 덕택에 이 절차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 동문의 은사였던 당시 임숙재 숙전 교장(숙명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의 추천으로 공주여자사범학교에서 교직에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지금은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 동문이 교사를 시작할 때는 넘어야할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추진력으로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갔다.

소중한 인연과 나눔의 실천

이 동문은 자신이 교육을 통해 인생의 밑거름을 마련했듯이 다른 이에게도 그 값진 기회를 나누고자 했다. 그는 교장으로 지내면서 총명하고 잠재력 있는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후원단체와 사람을 소개시켜 줬다. 한번은 총명한 시골아이의 신학교 입학을 도왔는데 그 학생이 훌륭한 목사가 돼 인사를 왔다고 말하며 “그럴 때야 말로 교육자로서 보람을 느끼지”라고 덧붙였다. 또 낙후된 학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학교에 전기를 들이고, 주변에 도로가 놓일 수 있게 애썼다 한다.

이 동문은 그의 인생에 대해 “다른 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좋은 사람이 되자는 신념과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리는 모습으로 살아왔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 동문의 인품 때문일까. 그에게는 항상 값진 기회들이 주어지고, 좋은 귀인들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이 동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인연으로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추천해 준 임숙재 은사와 이 동문의 신앙을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 지인들을 꼽았다. 이 동문은 사람간의 ‘인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며 한 일화를 들려줬다.

그가 교장으로 재직할 때, 한 가난한 청년이 장사 밑천으로 리어카를 마련해 달라며 이 동문을 찾아왔다고 한다. 순간 이 동문은 당황스러웠지만 곧 청년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동문은 “누구를 만나도 차별하지 않고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라며 우연히 찾아온 인연도 무시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자와 마찬가지로 이 동문에게는 두 아들의 ‘어머니’역할도 중요했다. 그는 유복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아끼고 감싸기보다 자립심과 지혜, 자부심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자 했다. 이 동문은 행여 두 아들이 의기소침해질까 염려해 “가난해도 마음은 부자다. 떳떳하게 비굴하지 않게 그리고 신앙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야한다”고 항상 일러줬다. 현재 이동문의 큰 아들은 판사직을 거쳐 대법관으로, 작은 아들은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숙명은 든든한 삶의 밑천

이 동문은 학교를 방문했을 때, 발전한 학교모습을 보고 큰 감격을 느꼈다고 했다. 재학생이 만 명정도에 단과대학도 9개인 현재 규모를 말하자 “와, 숙명이 엄청 컸구나”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 동문은 “나에게 ‘숙명’은 삶의 밑천,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든든한 재산이야”라며 숙명과의 관계를 표현했다. 또한 “누가 어디출신이냐고 물으면 난 당당하게 숙전이라고 말해”라며 자부심에 가득 차 말했다. 이 동문은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남녀의 구분도 엄격하고 남아선호사상이 뚜렷한 시대였지”라고 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우리학교 출신의 총장과 교수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이 뿌듯해진다고 덧붙였다.

이 동문은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제 여자는 사회의 약자가 아니라 강자야. 입으로 넣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넣는 것,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교육이 중요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동문은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환경에 살고 있는 후배들이 게을러지거나 흐트러질 때 중심을 잡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즉 내적인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배운 만큼 표현하고 배운 만큼 생각한다는 말이 있는데, 지성인으로서 4년을 배운 여자답게 행동해야해”라고 당부하며 후배들이 대학생활에서 많은 것을 얻어내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이 동문은 인터뷰 내내 기자들의 손을 꼭 잡으며 얘기했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따스함에서 ‘숙명’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동문의 삶은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숙명’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이 동문은 추진력과 침착한 면모를 지니며 시대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교육 그리고 사회를 위해 힘썼던 그는 지금의 리더십이라 일컬어지는 ‘힘’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영자 동문의 삶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우리 숙명의 전통과 힘이 많은 숙명인에게 전해져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김윤 기자 smpky76@sm.ac.kr

김해나라 기자 smpkhnr76@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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