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3호 글로벌 탐방면-상하이에서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상하이로 떠난 탐방단은 도시환경ㆍ경제ㆍ문화로 팀을 나눠 각각의 주제와 관련된 기관을 방문했다. 그 중 문화 팀은 상하이의 ‘루쉰 기념관’과 ‘루쉰 고거(故居)’를 찾았다. 루쉰. 그는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이자 사상가다. 그러나 탐방단에게 ‘루쉰’은 너무나 어려운 존재로 다가왔다. 상하이로 떠나기 전 함께 『아Q정전』『광인일기』와 같이 유명한 그의 작품을 읽었지만, 내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직접 루쉰의 삶을 만나는 것은 약간의 중압감 속에서 출발했다.


민중을 위해 문학을 선택하다
원래 의과대학생이었다는 루쉰. 의학 공부를 하던 그가 어떻게 문학가의 길을 가게 된 것일까. 어린 시절 병으로 허무하게 아버지를 잃고 난 후, 그는 아버지 같은 사람을 위해 발달한 서양 의술을 공부하기로 한다. 1902년 21살의 루쉰은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서양 의술을 가르치는 일본 센다이 의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센다이 의대에서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루쉰은 수업시간에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중국인들이 같은 중국인 스파이의 처형을 구경하며 즐기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순간 그는 의학으로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중국인의 정신을 깨우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루쉰은 의학공부를 중단하고, 민족의 정신을 치료하고자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양무(洋務)운동*이나 변법자강(變法自彊)운동* 등의 개혁이 일어난다. 루쉰이 중국에 돌아온 지 2년 후에는 신해혁명*까지 발생한다. 그러나 부분적인 개혁으로 치유될 수 없을 만큼 중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정부는 군벌과 타협했고, 개혁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더 억압받았다. 이 때, 루쉰은 자기문화의 부정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중국 현대문학의 선두에 섰다.

루쉰은 대표작 『아Q정전』에서 우둔한 주인공 ‘아Q’를 통해 군벌 세력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성을 개조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또한 우월주의에 빠져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국제 정세에 어두운 중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박성훈(중어중문학 전공) 교수는 “루쉰은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며 “그는 ‘나의 피를 혁명에 바치리라’고 했을 정도로 글로써 국민의 정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민족 혼'
탐방 중 상하이 사범대학에서 만난 현지 학생은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루쉰을 잘 아느냐’고 묻자 ‘학교에서 그의 작품을 필수로 배울 뿐 아니라 많은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탐방단은 사전조사를 통해 그가 중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국인에게 직접 들으니 그 이름이 더 크게 느껴졌다.

루쉰이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상하이에는 그를 기념하는 ‘루쉰 기념관’이 있다. 루쉰 기념관은 입장료가 무료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을 위한 영어 안내 서비스를 통해 ‘설명이 있는 전시’를 제공하고 있었다. 탐방단도 이 서비스를 이용해 전시 하나하나와 관련된 설명을 들었다. 기념관에는 『아Q장전』『광인일기』를 비롯한 그의 손때 묻은 친필 원고와 사진들이 있었고, 책의 중요한 장면들은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루쉰의 작품부터 알려지지 않은 사소한 이야기까지…….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적으로 루쉰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루쉰을 ‘중국문화혁명의 주장(主將)’ 이라고 평가했다. 루쉰을 중국의 문학적 상징으로 규정한 것이다. 루쉰 기념관 관계자는 루쉰에 대해 “그는 뛰어난 작가였으며 중국인들은 루쉰을 ‘민족혼’ 그 자체로 추앙한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정부영(경제 08) 학우는 “자랑스럽게 루쉰에 대해 설명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루쉰이 그들 가슴 속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았다”고 말했다.
루쉰 기념관에서 도보로 10분 떨어진 거리에는 루쉰 고거(故居)가 있었다. 루쉰 고거는 그가 마지막 생애 3년을 보낸 집이다. 이곳에서 그는 9권의 문집과 역사 소설을 출판했고, 외국 문학도 번역했다.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그의 부인 쉬광핑이 생전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상하이에 오지 않았다면, 탐방단은 루쉰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루쉰’ 하면 어려운 작품을 쓴 인물로 기억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하이에 와서 탐방단은 그를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인생과 중국 근대사에 대해 돌아보고 나니, 작품 한 줄의 의미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루쉰은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갔다. 중국의 변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인물이었다. 이보영(인문 05) 학우는 “그는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신념에 따라 실행에 옮겼다. 루쉰을 알아가며 국적을 떠나 한 인간에게 존경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루쉰 기념관에서 만난 단편 『고향』의 문구는 이러한 그의 인생관을 말해주는 듯 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사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양무운동 : 19세기 후반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
*변법유신운동 : 양무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 개혁을 주장
*신해혁명 : 청나라가 멸망하고 쑨원이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 그러나 이후 대총통을 맡은 위안스카이는 군벌독재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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