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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향한 위대한 용기, 의사(義士) 안중근
민유경 기자  |  smpmyk75@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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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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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일곱발의 총성이 하늘에 퍼졌다. 다음 순간, 러시아 경찰이 안중근을 덮쳐 눌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러시아어로 하늘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코리아 우라(만세)! 코리아 우라!”
이 날로부터 어느덧 100년이 흘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청년, 의사(義士) 안중근.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20대의 열정을 구국운동에 쏟다
1879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안중근의 어릴적 이름은 ‘응칠’이다. 태어날 때부터 배와 가슴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이라 했고, 자라면서 성격이 가볍고 급해 무거울 중(重)을 써서 ‘중근(重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린 시절의 안중근은 글공부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사냥하기를 즐겨 마을에서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안중근은 개화파 출신인 아버지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신식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22세때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흔히 알려져 있는 ‘도마 안중근’의 ‘도마’는 그의 세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프랑스 신부에게 신학을 배우던 안중근은 서양 문명에 눈을 뜨면서, 일본에 의해 휘청거리는 조선의 현실을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조선의 장래를 걱정하며 구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안중근은 먼저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안중근은 ‘대학교 설립안’을 만들어 당시 조선의 천주교회를 이끌던 뮈텔 주교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전 재산을 털어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한다.
또한 그는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서 평안도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라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부인의 패물까지 헌납하며 사람들에게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안중근은 그렇게 20대의 열정을 구국운동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항일 의병 전쟁을 이끌다
1907년, 을사조약 이후 2년 만에 조선의 국운은 기울었다.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신협약의 체결, 강제 군대해산에 반발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안중근은 더 이상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연해주에 가서 의병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인촌을 돌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오늘 우리는 의병을 일으켜 독립의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강한 힘으로 국권을 회복해야만 제대로 된 독립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안중근과 주위 사람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해외 독립군 부대인 ‘대한 의군’이 탄생했다. 안중근은 참모 중장이 됐다.
의병활동은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해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 당시 일본은 항일 의병을 재판도 없이 체포 즉시 목을 매어 죽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일본의 무자비한 행동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모두 분노하게 만드는 것일세. 이제 우리들마저 그런 야만스런 행동을 하고자 하는가?” 라며 일본군 포로를 풀어줬다. 그러나 안중근이 포로를 풀어주면서 일본군의 수는 의병보다 많아졌고, 결국 대한 의군은 전쟁에서 패했다. ‘만국 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다’던 안중근은 그처럼 어진 인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대한 의군은 결국 내부 비판 속에 해체되고 말았다.

   

▲안중근의 단지된 손가락

   
 


피로 쓴 대한독립을 열망하며
이듬해인 1909년, 안중근은 대한 의군 동료 열두 명을 다시 만났다. 안중근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사람들에게 특별한 단체를 만들 것을 건의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하고, 한마음으로 단체를 만듭시다. 그런 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어떻소.” 열두 사람은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썼다. 안중근에게 ‘독립’ 이란 손가락을 잘라내도 모자랄 만큼 굳은 의지를 갖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늘이 기회를 내려준 것일까. 그 해 9월, 러시아 엔치야 지방에 머무르던 안중근은 불쑥 건너간 연해주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그는 옥중에서 남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연히 마음이 답답하고 초조해서, 진정하기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불쑥 연해주로 간다고 말하고 배를 탔다. 그곳에 이르니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도착하기로 돼 있었다. 나는 남몰래 기뻐했다.’ 안중근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한 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의병전쟁에서 이루지 못한 승리를 되찾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드디어, 하얼빈의 아침이 밝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 안중근은 마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러시아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지만, 그는 일본인 환영객 사이에 끼어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9시가 되자 하얼빈역으로 열차가 천천히 들어왔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도착한 것이다. 러시아 경찰이 호위하고 걸어오는 일행의 선두에 노란 얼굴에 흰 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노인이 나타났다. 안중근은 이 ‘작은 노인’과 대면하는 순간, 이 사람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권총을 빼 들었다. “탕, 탕, 탕…!”

3개월 후,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정부는 한국, 러시아, 영국, 심지어 일본 변호사의 변호까지 무시하고 안중근에게 일방적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대한 제국의 의병장으로서 조국을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사형보다 더한 형벌은 없는가?”라고 떳떳이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인품은 교도소에서도 빛이 났다. 일본인 간수들마저 그를 존경하며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그의 붓글씨를 좋아한 일본인 간수들이 너도나도 ‘글씨 한 점만 써달라’고 부탁해, 안중근은 그들에게 유묵(遺墨) 200여점을 남겼다. 또한 안중근은 수감생활 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그러나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해 약속받았지만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순국 후, 가족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안중근의 유해를 뤼순 감옥 뒷산에 강제로 매장했다. 지금까지도 의사(義士) 안중근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의사(義士) 안중근. 그는 의열 투사일 뿐 아니라, 이미 청년기에 구국운동에 힘쓴 교육가이자 지식인이었다. 또한 스스로 의병부대를 만들어 항일 의병전쟁을 감행한 의병 대장이었다. 그의 순국은 그 동안 침체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용기를 얻고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마지막 유언에서조차 안중근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잊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오직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더 나은 안위뿐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독립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도랑가서 동포들에게 각자 모두가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안중근의 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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