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말처럼 새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가 아니(어야 한)다. 가치는 오직 시간을 거슬러 인간의 무늬[人紋]와 합류할 때에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가치란 인문학적 개념의 전형이다. 그러나 근년의 한국사회에서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니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니 하는 시간성의 인문적 가치를 내세우는 일마저 아무래도 점직한 노릇이 되고 말았다. 가치가 아니라 ‘값’으로 승부하는 세상, 삶의 질로부터 미소에 이르기까지 모짝 화폐로 환산가능한 세속, 우리의 소비자본주의적 현실은 온통 ‘차이를 느껴 보세요!’(‘Feel the difference!’)라는 광고물로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부화(浮華)한 압축근대화의 정점에서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새로움을 쫓는 강박으로 왁달박달하고, ‘새것컴플렉스’에 떠밀려 이리저리 쏠리며, 대학(큰 배움터)이라는! 곳에서마저 새로운 것(‘아이디어’)만을 좇는다. 남명 조식(曺植)의 낡디낡은 말처럼 결국 인문정신이란 정밀함(精)과 묵힘(熟)이 더불어 이루어가는 지혜의 지평인데, 대학조차 자본과 아이디어의 현란한 접속, 그 ‘일차원적 요약’(마르쿠제)으로 바쁘다.

굳이 실용이라 해도, “차이는 실질적인 차이를 낳아야”(W. 제임스) 하지만, 새것들로 그득한 시장의 풍경은 기호의 변통(變通)이거나 유행의 나르시시즘, 혹은 실질이 없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연쇄인 게 대다수다. 호르크하이머의 지론처럼 ‘차이’(새것)가 영원해지려면 결국 그 차이의 내용은 아무도 모르게 사상(捨象)되어야 하는 법! 이미 숱한 학자들이 조곤조곤 따지고 분석해놓은 것처럼 상업주의의 거품 속에 빠진 개인들의 개성이란 환각이거나 ‘체계의 단말기’(울리히 벡), 혹은 한갓 지리한 삶을 살게 돕는 ‘대리보충물’(프로이트)에 불과한 것이다. 요컨대 체계(사회적 총체성)를 놓치고 마음(개인)을 알 수 없는 법이며, 과거(역사성)를 놓친 채 현재와 미래의 삶을 헤아릴 수 없다. 프로페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인문학적 아마추어리즘은 바로 이 통합의 틈을 쉼없이 메워나가는 섬세의 정신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인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시태를 거슬러 근본으로 되돌아가는(逆時歸本)’ 반시대적 기획이자 그 생활양식일 수밖에 없다. 마치 소수민족 언어들처럼 나날이 절판되어 가는 고전들은 캐고 보듬는다는 것은 단지 복고주의나 고물상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맥루한의 비판처럼 ‘신매체의 효과를 이해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종이책 인문주의자들의 습관적 고정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적으로 입체적이며 중층적인 인문(人紋)의 사유를 향한 모험이다. 그것은 새것의 쏠림, 속도의 현기증, 작은 차이들의 나르시시즘, 편이한 요약, 상업적 욕망의 포박, 그리고 ‘나태한 평화’(니체)에 대한 슬기로운 저항이다.

인문학의 죽음을 손쉽게 주워섬기는 세태 속에서 인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인문(人紋)이라는 그 오래된 미래(새로움)를 다시 호출하는 일이다. 인문학의 무능을 떠들며 일차적 실용주의와 처세술을 대안인 듯 내세우는 세태 속에서 한 줄 한 단락을 곱새겨 읽는다는 것은 그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무능 속에서 인문학적 급진성을 캐는 일이며, “더 이상 책이 책같지 않은 세상에서 책이 아닌 것이 오히려 책”(아도르노)인 바로 그 책을 찾아나서는 길이다.

*逆時歸本(역시귀본): 시대(태)를 거슬러 근본으로 돌아간다

김영민 교수

의사소통센터 겸임교수
드루대학교대학원 철학과 박사
주요 저서 - 자색이 붉은색을 빼앗다(동녘), 지식인과 심층근대화(철학과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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