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삶을 묻다

조영은(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넓은 도마 위로 회 빛 칼날이 번뜩이며 내리 꽂혔다. 한여름의 햇살은 네모반듯한 식칼에 닿는 순간 눈 시린 섬광을 질러 놓고 사라진 뒤다. 질긴 덩어리를 갈라 베는 날 끝으로 뭉뚝한 살점이 떨어져 나온다. 손마디 끝에 닿는 민들민들한 육질에 여자는 저도 모르는 사이, 꽤 만족한 듯 입 꼬리를 치켜올린다. 그러나 결코 그곳에 만족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두터운 팔뚝 살이 덜덜거리도록 연달아 힘주어 식칼을 내리꽂는다.
퍽퍽-
이미 한번 살생의 아픔을 겪은 고기 덩이는 또다시 맞는 ‘죽음 안의 죽임’이 억울하였던지 마구 휘 갈구는 난도질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사이 조각조각 잘려진 빨간 고기들은 어느 샌가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고기 뭉치를 도마 위에 한데 모은 여자는 그래도 영 시원치가 않은지 손바닥에 힘을 주어 손가락으로 마구 주물럭대기 시작했다. 웬만한 사내쯤은 무색하게 만들 만치 넓적한 손바닥이었다. 때문에 고기의 그램 수를 잴 때도 조금씩 보태 가며 저울질하는 일이 없었다. 한 번에 덥석, 지나치게 많다 싶을 정도로 덜어내는 그녀의 손은 컸고, 씀씀이 또한 그러했다. 마디마디 굵게 잡힌 주름 사이로 어느덧 돼지고기의 진한 피비린내가 고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씻어도 씻어도 결코 그 손마디를 벗어나지 않을 이미 그녀만의 체취인지도 모른다.
질김의 여부를 몇 차례 더 확인한 뒤, 꾸욱 꾹 손가락으로 고기를 눌러보던 여자는 찬장에서 커다란 양념장을 꺼내 사정없이 덩어리 위로 들이붓기 시작했다. 매콤한 간장 냄새와 고소름한 참기름 향이 그녀만으로도 빼곡한 정육점 안을 가득 메웠다. 이어서 파와 마늘을 포함한 몇 가지 재료들을 더 넣은 그녀는 다시금 사정없이 돼지고기를 양념과 함께 반죽하기 시작했다. 힘을 주어 치댈수록 그녀의 팔뚝 살이 흐물거리며 좌우로 흔들린다. 골고루 양념 베이게 하기 위한 그녀의 손놀림이 팔뚝 살과 아울러 요동쳤다.
덜덜거리는 천장의 고물선풍기만이 그녀의 요리솜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일한 관람객 하나로는 이 살인적인 더위를 견디기에 무리였는지, 으깨지도록 반죽하는 그녀의 이마위로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맺힌다. 손등으로 땀을 훔칠 여유 하나 없이 여자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덩어리 하나로 쏠려 있는 터였다. 양념에서 진한 물이 우러나올 때까지 분주히 움직이던 그녀는 또다시 살점 하나를 집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육질의 질김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선홍빛 고기 조각은 이미 살 속 깊이 물든 양념으로 인해 검붉게 희색이 변해있는 터였다. 폭이 넓은 바가지에 힘주어 꾹꾹 눌러 쟁이는 그녀의 익숙한 손놀림이 맛깔스러웠다.

‘광동 정육점’ 간판에 불이 들어온 것은 저녁 여덟 시가 훨씬 지난 후였다. 어찌나 밀어닥치는 손님들이 많던지 정신없이 고기를 자르다 보면 그새 불을 켜는 일조차 잊고 마는 것이다. 한여름이 되고 보니 너나없이 피서를 간다며 온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푹푹 삶아 재끼는 더위 탓에 자칫하면 고기가 상할 만도 하건만, 그래도 없이 사는 서민들이 마음놓고 고기 좀 씹어보겠다며 하나같이 사데는 것이 다름 아닌 삼겹살이었다. 한바탕 온 가족이 돌 판에 둘러앉아 고기 구우며 나누는 말 한마디, 대화 한 토막이 생각만으로도 그리 즐거울 수 없다. 썰다 남은 살점들로 지저분한 도마 위를 닦으며 그녀는 까닭 모를 씁쓸함을 느낀다.
“아이고, 이거 미안해서 어째요, 내가 너무 늦게 온건 아니죠?”
“그렇잖아도 안 온다 혔어. 깜박 잊은 줄 알고 정임이 편에 보내려고 했는디, 야가 뭔 일로 이리 늦는지....”
“아휴, 뭘 번거롭게 그래요. 내가 시간 맞춰 다 알아 올 건데. 간은, 맞아요?”
“전번 치가 하도 싱겁다고 하걸래 많이 치댄다고 혔는디, 한번 맛 볼텨?”
주인 여자는 냉장 칸 아래쪽에서 오후 내내 재워 놓은 고기 바가지를 꺼냈다. 건너편 ‘신영약국’ 부부약사인 윤 새댁은 매번 시어머니가 당도할 때마다 사전에 양념된 고기를 부탁해놓는 버릇이 있었다. 요리를 못한다며 하도 구박받고 지낸 시집살이라 이제는 아예 손수 큰 음식을 만들기에는 의욕을 잃어버린 소심한 며느리였다. 변두리 시골 마을 어귀에 약국을 하나 얻으면서 어렵사리 분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시어머니가 어렵기는 당연지사. 참다못해 고심 끝에 짜낸 방편이 바로 돼지고기였다.
“오늘따라 시어머니가 늦으시나보지?”
“네. 차가 밀린 다네요. 다들 피서철이라고 주말이면 고속도로가 난리도 아니에요. 아줌마 네도 가게 문닫고 한 몇 일 쉬셔 야죠. 남들 배부른 일만 하시다 이 좋은 피서철 다 날리 시겠어. 안 그래요?”
“......”
돼지고기를 빌미로 한바탕 쏟아 놓는 새색시 특유의 수다스러움은 후덥지근한 여름밤, 딸리는 일손 탓에 지친 주인에게는 시원한 즐거움이었다. 약국에선 직장의 동지로, 집에선 삶의 동반자로 하루종일 붙어 지내는 남편을 두고 마음 없는 험담을 늘어놓다가도 문득문득 아직 당도하지 않은 시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 하는 새댁의 모습은 곁에서 보기만 해도 부러움이 절로 났다. 정육점 계산대 앞에서 정신없이 늘어놓는 그녀의 넋두리는 삶에 녹아 든 행복에서 오는 작은 투정에 불과했다.
컴컴한 도로를 새하얀 헤드라이트가 뒤덮더니 이윽고 신영 약국의 건장한 바깥주인이 이곳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터미널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다.
“어머머! 내 정신 좀 봐. 이를 어째요! 이걸 집에 갖다 놓았어야 하는데. 이를 어째! 아줌 마, 나 그냥 가요. 돈은 내일 드릴게!”
주인 여자는 한쪽 옆구리에 숨기듯 바가지를 끼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새댁의 뒷모습에서 한 동안 눈을 땔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양념된 돼지고기로 미운 털을 뽑아 보고자 애쓰는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했다. 그녀에게 와서 머뭇머뭇 부탁하던 처음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벌써 약국 집의 비밀 요리사가 된 지도 근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막 여름이 시작하려던 6월 초였으니 제법 시간이 흘렀을 법도 했다.

의외로 사료 앞으로 달라 들지 않는 요놈들이 수상쩍다. 간밤, 누가 와서 음식 찌꺼기라도 흘려주고 간 것인지 유독 이 두 놈만이 그 잘뚝한 목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별 반응이 없다. 그래. 네 녀석들도 무슨 흥이 나서 먹어대겠느냐. 어차피 실컷 배부름을 즐기다 한순간에 죽어 나가고 말 운명일 텐데.
“사료 다 줬으면, 어 여 와 밥 먹어. 오늘은 할 일도 많다. 서두르자.”
걸죽한 여자의 목소리에 정임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양동이를 우리 안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귓속을 후비는 섬뜩함이 땀방울과 함께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부단 더위 때문만은 아니리라. 요즘 들어 정임은 더더욱 이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에 잦은 몸서리를 치고는 한다.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참아 내기에 점차 한계가 오는 것일까. 정임은 가능한 한 자신의 치솟는 뜨거움을 다른 대상에게로 풀어 버리려는 듯, 먹이 주는 손에 힘을 가한다.
“어젠 또 어딜 그렇게 쏘다닌 게여? 가게 문 닫을 시간이면 후딱후딱 들어와야 될꺼 아 니냐.”
“......”
“아, 귀 먹었냐! 허파에 바람들은 돼지새끼 만치로 그리 싸돌아 댕기지 말란 말여. 오늘은 옆에서 좀 거들어라. 피서철이 되놔서 이 좁아터진 마을도 다들 놀러 간다고 난린 갑다. 오 후에 먹이 주는 거 잊지 말고.”
정임은 말없이 젓가락으로 밥알만 굴렸다. 밥 먹는 시간이나마 좀 벗어나고 싶은 돼지 얘기는 오늘도 어김없이 밥상 위에 뛰어들었다. 그저 식욕을 해결하는 이 유일의 시간만큼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정육점 딸의 이름만 벗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을...... 허나, 밥상을 가득 메우는 간밤 팔다 남은 돼지고기의 잔재는 이미 오랫동안 구역질 나도록 정임을 괴롭혀 오던 터였다. 이 비릿한 살 냄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벗어 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그녀였다.
허공에서 잠시 방황하던 정임의 젓가락은 다시금 밥공기로 돌아와 윤기 나는 밥알을 집어든다. 매일 매일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쌀, 내 어머니에게 있어서 돼지고기는 이 쌀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정임은 신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간신히 참아 내고 있었다.

“아이고, 이 더운 날씨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뭔 일 이래요? 날짜 맞출 라면 낼모레나 되야 할텐디, 정말 더위라도 잡수신 게요?”
고기를 유통시켜주는 중개인 ‘오씨’가 요사이 부쩍 하루가 멀다하고 정육점을 찾아 들었다. 애써 태연한 척 반갑게 그를 맞았지만, 고기 자르는 여주인의 온 신경은 곤두 설 대로 서 있는 상태였다. 오씨는 고물 선풍기 바로 아래 춤에 앉더니 주인의 눈치를 슬금슬금 봐 가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돼지 키우는 건.... 잘 되시나?”
“글씨, 인자 소일거리로 한번 시작해 보는 지라. 힘이 부치기는 하지만서도 아즉은 키울 만 하데요.”
“암, 암, 여자 둘이서 그 많은 돼지들을 키우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나도 진작 부 터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니까.”
슬금슬금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사내는 곰 살 맞게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쓰러질 기반도 없을 무렵, 가진 돈 다 털어 헐값에 구입한 이 정육점에 고기를 대어 주기 시작한 오씨가 처음엔 고마울 법도 했다. 적어도 고것이 다 다른 맘보가 있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살아보겠노라고 바둥거리며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놓고 보니 이제서야 그 새카만 수작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래를 끊을까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으나, 이제 겨우 터를 잡은 지라 당분간 든든히 고기를 데어 줄 연결 고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큰 이유는 함부로 끊을 수 없을 만큼 오씨네의 육질이 뛰어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여자는 당분간 계속 거래를 할 생각이다. 아직은 새끼들을 들여와 기르는 것에만 급급했지, 도청의 허가를 받아내어 도살(屠殺)하는 데 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은 터였다. 게다가 당장 거래를 끊고 우리 안의 돼지들만으로 충당하기란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렇게 정 힘이 딸리면, 내가 와서 좀 도와주고 갈까?”
“신경 끄시구랴, 바쁘신 양반이 이렇게 소일 하셔야 되겠소?”
“허허, 오늘따라 왜 이리 섭섭하게 구시나. 내 어디 김 사장 수고나 덜려고 이러는 줄 아 쇼? 이게 다....”
삐걱거리는 미닫이문의 그슬림과 함께 정임이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점심 한철 사료를 주고 오라 시킨 일이 이제야 다 끝났던지 그녀의 온 몸 가득 구릿한 돼지 냄새가 베어 있었다.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녀는 선풍기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쐬기 위해 오씨의 옆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사내의 코끝으로 훅, 하는 정임이의 체취가 전해졌다.
“어이구, 이게 누구여? 그새 몇 일 못 봤다고 많이 예뻐졌구만. 이렇게 다 큰 처녀애를 맨 날 돼지한테 사료나 주라고 부려먹을 셈이요? 아따, 그놈의 돼지 새끼들 호강하는 구만.”
“할 말 다 하셨음 돌아 가시구랴. 이제 곧 손님들 닥칠 시간이요. 그라고, 낼모레 올 땐 사골 뼈도 한 너 댓게 가져 왔음 싶은디..... 이 여름철에 다들 보신해야 한다고 찾고는 난리도 아니요.”
“이거 섭섭하게 사람을 이리 문전 박대하다니. 아, 다 큰 딸 생각도 해야지. 처녀가 혼자서 돼지 사육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일이요!”
오씨는 정임의 등장으로 힘을 얻었는지 더 들으라는 듯 제법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앉은 채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분개를 하더니 이제는 딸과 어미를 한번씩 번갈아 봐 가며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득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정임은 무슨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신을 감싸고도는 듯한 오씨의 언변에 적잖이 고마워하고 있는 터였다. 두어 달 가까이 돼지를 돌보면서 누구보다 지친 그녀였다. 희부연 살덩이들이 요동치는 우리 앞에 들어서면 우선은 턱, 하니 막히는 호흡부터 여간 곤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씨는 한바탕 열변을 토하더니 이내 뒤돌아볼 것 없이 가게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열린 문틈 사이를 여자는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아무런 미동 없이 오로지 고기만 썰고 있을 뿐이었다. 고물 선풍기의 잡음만이 무더운 침묵을 삭여주고 있었다.
타인조차도 자신을 저리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건만, 엄마라는 존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저 커다란 손바닥 안으로 이렇게 커버린 딸을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겠지. 정임은 이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온 몸 가득 퍼지는 살 떨림을 느꼈다. 언제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온 자신의 스무 해. 그리고 살아가야 할 인생. 태어나는 순간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 고기 냄새가 참을 수 없이 끔찍하다. 정육점 집 딸로 낙인 찍혀 살아온 인생이 못 견디게 억울하고 분했다. 아버지가 떠난 것도 어찌 보면 다 저 여자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나를 이리도 가두려 하는 것이리라.
정임은 모든 것이 어머니의 탓이라 단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날 때 한없이 기뻐하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치밀었다. 몇 해마다 한 번씩, 얼굴이 희미해져갈 때쯤이면 한 번씩 나타나 집안을 들쑤시고는 사라지는 사람. 그가 다녀간 뒤론 항상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갔다. 저런 모양새로 남편을 잡아먹듯 했으니 누군들 곁에 남아 있으려 했을려구. 어미와 딸, 모녀라는 그 혈육의 관계에 쓴웃음이 난다.
여자 역시 원래부터 정육점 집 외동딸이었다. 정임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 또한 고깃집 딸이라는 고매한 낙인찍힌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장인(匠人)정신의 숭고함 따위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던 여자 아이였다. 철없는 동네 녀석들에게 놀림받는 것도 모자라 항상 신물나게 지겨운 고기 반찬을 보고 있노라면 매번 밥상을 뒤엎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도 순종적인 딸이었다.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는 비계 덩이는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맴 돌 정도로 몸에 받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물을 찔끔거리며 삼키는 그 지긋지긋한 고기 덩어리가 좋아진 것이 그녀의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아주 가끔씩 이장 댁의 하나뿐인 외손자를 볼 수 있다는 유일한 낙에 있었다.
스무 해를 갓 넘겨 어엿한 처녀 냄새가 풍기는 그녀는 이제 막 남자를 알아 가기 시작한 여자였다. 서울서 사고를 치고 할아버지 댁에 조용히 내려와 있는 그를 둘러싼 무수한 풍문이 많았지만, 그녀의 귀에 그 소리들이 들릴 리 만무했다. 그녀는 돼지에게 먹이를 주러 가는 지름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이장 댁 집안을 지나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옆모습이라도 보고자 고개를 기웃거려 보다가도 행여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그녀는 감정을 숨기기에 너무나 서툰 여자였다. 그러던 것이 그가 이장 댁 생신 잔치에 쓸 고기 거리를 사러 우연히 가게에 들른 날 이후부터 길가에서 마주쳐도 자연스레 얘기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날도 후덥지근하게 바람 한 점 없는 한 여름 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는 유독 큰 그녀의 손바닥 안에 끈적하게 베어 나오는 땀방울로 짐작하고도 남음이리라. 되도록 이면 빨리 일을 끝내고 몸에 찬물이나마 부어야겠다는 심사(心事)에 종종걸음으로 농장에 다다르는 순간,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맞이했다. 예전부터 자신도 그녀의 뒤를 따라 먹이를 한번 주고 싶었다는 한마디에 스물 한 살 처녀의 얼굴은 순진하게도 빨개졌다.
우리 안의 돼지들은 낯선 사내의 등장을 경계하며 한데 무리 져 정신없이 울어대고 있었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두 귀가 멍해질 정도였다. 먹이 주는 방법이라고 해야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몇 번 먹이를 주는 시범을 보인 뒤 그에게도 함께 줄 것을 권했다. 좀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쭈뻣쭈뻣 거리는 그는 서너 번 우리 안으로 사료를 부어 주더니 갑자기 시선을 한곳에서 떼지 못했다.
어쩐지 저 한 놈이 요 몇 일 새 식욕이 줄고 힘이 없어 보인다 했다. 한 마리 한 마리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 온 그녀가 그 암퇘지의 근황을 모를 리 만무했다. 역시나 교배를 하기 위한 징조였었다. 암컷을 아래에 엎드려 놓고 위에서 올라타는 수퇘지는 계속 소리를 쳐 질렀다. 꽤액 꽤액, 탁한 소음이 후덥지근한 공기를 휘어 갈겼지만, 그도 그녀도 한동안 멍한 듯 시선을 땔 수가 없었다. 수컷은 암컷과 미친 듯이 뒤엉켜 우리 안에서 발광을 하다 지치기 시작했는지 점차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져 갔다. 욕정에 불타오른 돼지의 성교 장면은 비록 한 갓 짐승이라지만, 이상하게도 이 후덥지근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는 건장한 남녀로 하여금 묘한 자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연 분홍빛 토실토실한 살덩이가 눈앞에서 심히 요동칠 때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은 딱 그만치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이윽고는 수십 마리의 작은 덩어리는 점차 살이 되어 붙어 눈앞에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져 보이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미세한 신음소리가 세어 나오는 순간, 그녀 역시 덮쳐 오는 커다란 살덩어리에 그녀 자신을 한데 뒤엉켜 가고 있었다.

몇 일째 식욕이 없던 두 녀석 중 한 명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별일이다 싶어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난폭하고 못되먹기로 유명한 놈이 성격 또한 온순해진 노릇을 차마 알 길이 없었다.
“새끼를 벤 게여. 인자 조금 있음 복부랑 유방이 커질 법이다. 한동안 태동을 보다 좀 커졌다 싶으면 손으로 만져봐야 하는 거여. 음부가 벌어지면 그럼 그때 새끼 받을 준비를 해달라는 소리니께. 앞으로 두고두고 잘 지켜봐야 헌다. 그라면서 하나쓱 배워 가는 거니께. 딴 생각 말고 이 일이나 열심히 혀.”
그녀가 처음 딸 정임에게 돼지 사육하는 일을 맡겼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딸아이를, 그것도 이제는 어엿한 처녀티가 흐르는 딸을 앉혀 두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애미의 모습에서 정임은 처음, 무정함을 읽었다. 울고불고 제발 그 일만은 시키지 말아 달라 그리 통사정을 해도 그녀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여자의 고집 이전에 정임은 그야말로 자신의 어머니를 고스란히 닮았던 것이다. 아무리 죽도록 싫고 내키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수태 한 암퇘지 주위를 신이 난 듯 맴도는 수컷의 꼬리가 등 쪽으로 동그랗게 말려서는 이내 좌우로 한번씩 흔들린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어리기만 했던 놈이 어느 새 제 종자를 심을 줄도 알고, 신기한 노릇이다. 마냥 어리고 흐물흐물 하던 다리 쪽에 제법 살이 올라 근육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봤자 무엇하나. 곧, 잡아먹히게 될 것을. 너의 종자를 양성할 만한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온몸에 근육이 붙어 오르면 결국엔 연한 한 점 살코기가 되어 누군가의 입 속에 쳐 넣어져 버릴 것이다. 종자를 양성할 능력이 절정을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 정육점 주인,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어여 어여 번식을 해야 하루빨리 농장을 만들지. 아직 요놈들로는 택도 없지. 암,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쟤.”
“농장을 만들어 뭘 할건데. 그때까지 날 이놈들과 묶어 놓을 셈이야!”
“잔소리 마라. 딴 맘 먹지 말란 소리여. 넌 그저 얌전하게 있으면 되는 거여. 기냥 내 옆에서 이 녀석들 키우고 가끔 가게일 봐주면서 편하게 살다 보면 이보다 더 좋은 행복이 어디 있냐.”
“내가, 엄마인줄 알아?”
여자는 대답 대신 정임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이미 정임의 감정은 운명을 거슬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온통 가득 찼다.
“평생을 엄마처럼 살 순 없어! 이런 생활이 좋아? 엄마는 좋아?”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른다. 뭐든지 자기 팔자가 있는 거여, 따라야 쓴다. 네 한갓 젊은 혈기로 날뛰면 큰일나는 거여.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 결국엔 너도 어짜피 이런 팔자 아 니것냐.”
“엄만.... 어쩜 그렇게 자기 생각 만 해!”
정임은 들고 있던 사료 바가지를 우리 안에 던져 버렸다. 차라리 실컷 두들겨 패 주기를 바랐다. 그래. 실컷 죽도록 두들겨 맞자.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어눌한 말투로, 허점을 보이면서 자신을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여자의 눈빛이 정임의 온 몸을 채찍질하는 듯 했다.

오씨는 주문한 고기를 원래 날짜보다 3일이나 늦게 가져 왔다. 주인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지만, 약자의 비애를 느끼며 아무 말 없이 잔금을 치뤄야만 했다. 고기 바구니를 돌려주러 들른 윤 새댁이 옆에서 참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안 그래도 한창 바쁜 철이라는 거 아시면서, 이렇게 늦으시면 어디 아주머니 장사 해 먹겠어요?”
“모르는 소리 마쇼. 이 더운 여름 날, 어디 돼지 잡기는 쉬운 줄 아나? 지들도 죽으러 끌려가는 줄 알고 얼마나 버팅기는데, 더위 앞에 당할 장사가 어딨나.”
“아저씨는 장사 하루 이틀 해봐요?”
“아니 왜 새댁이 거들고 이 야단이야! 사장도 아무 소리 없는데. 그렇게 급했음 키우던 돼지 몇 마리 잡지 그랬나?”
빈정대는 오씨의 말투에 새댁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의뭉스런 눈빛이 맘에 안 든다며 자주 주인에게 험담을 늘어놓던 새댁이었지만, 덩치 큰 사내앞에서 대들만큼의 배짱은 없는 터였다.
고기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오씨는 한사코 물 한잔 얻어 마시겠다며 버팅기고 앉았다. 새댁이 대놓고 가라 일렀지만, 그는 한번 힐끔 쳐다볼 뿐 곁눈질로 누군가를 정신없이 찾고 있었다. 기분 나쁜 그 눈빛이 조그마한 정육점 안을 샅샅이 훓어 내리는 꼴이란. 주인 여자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오름을 느꼈다.
“정임이는....또 먹이 주러 갔나봐? 거, 다 큰 처녀한테 못할 짓이요. 내 가서 좀 거들어 줄까나?”
“잠자코 앉아 계시오.”
등 아래로 식은땀이 흘렀다. 함께 먹이를 주고 싶어 기다렸다는 이장 댁 손자, 잠시 잠깐 남편으로 머물렀던 한 사내의 모습이 오씨의 얼굴위로 포개어졌다. 스무 살의 순정을 자신의 한순간 성욕으로 토막내버린 비열한 인간.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 딸 앞에서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것은 결국 거스름을 도중에 포기한 자기 변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칼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은 어느새 부들부들 거리며 서서히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뒷마당으로 가면 되나? 흠, 아무래도 돼지 다루는 데는 내가 낫겠지. 가서....”
“나가, 나가! 신경 끄고 당장 나가버리란 말여!”
“아니, 나한테 하는 소린가?”
“당장 꺼지란 말이다, 이 더럽고 추잡한 인간아! 썩 꺼져버려! 내말 안들리냐! 꺼져, 꺼져, 꺼져버리란 말이여!”
“아......아니, 이 여편네가 어디다 대고 칼질이야, 칼질이!”
“엄마!”
정임이 정신없이 뛰어나와 방향 잃어 허우적대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제 아무리 양손으로 잡는다 해도 그 두툼한 손목을 어린 딸이 잡고 있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넋이 나가있던 새댁이 서둘러 모녀의 엉켜있는 팔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칼을 빼드는 새댁의 손놀림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진 깨진 유리 조각과 경사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흥건한 물줄기. 그리고는 벌겋게 달아올라 잔뜩 찡그린 오씨 얼굴이 차례로 들어왔다.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워지는 순간이다. 하마터면 저 칼에 사람이 죽을 뻔했다. 이제는 동물이건 사람이건 아주 닥치는 대로 죽이려드는군. 이 아수라장이 된 가게가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임은 한없는 수치심을 느낀다. 이유를 알 필요도 없었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정임은 좀 달래고 사정할 양으로 아직도 분이 못 이겨 씩씩 거리는 오씨에게 다가갔다. 사내의 코끝으로 훅 하는 정임의 온기가 전해졌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어요?”
“어찌 그렇게 딸이랑 애미랑 다른지,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곱게 들어먹을 생각을 해! 무식한 여편네가 성질만 더러워 가지고는! 어린애가 고생하는게 하도 안 쓰러 좀 도와주려 했더만! 그럴 바엔, 차라리 다 갖다 내다 팔아! 다 팔아버려! 저 정도면 한밑천 나오고도 남을 거요!”
그의 옷을 털어 주던 정임의 손끝이 주춤거렸다. 그 미세한 반응을 그가 놓칠 리 없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한번 더 밀어붙일 양으로 입을 떼던 사내는, 그러나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는 주인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그만 다리에 힘이 탁 풀리고는 말았다. 못이기는 척 쓰고 있던 모자를 한번 벗어 툴툴 털던 그는 오늘은 정임이를 봐서 그만 참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여자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했다. 자신의 딸을 지금 이 순간 잡아야만 했다. 갑자기 그녀는 떼 고함을 쳐 지르기 시작했다. 허나, 어딜 가냐고, 돌아오라고 목소리만으로 붙잡기에 그녀의 체력은 이미 지칠 데로 지쳐 있었다. 더욱이 이제는 정임이에게 있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리 만무했다. 오씨의 뒤를 정신없이 뛰쳐나가는 딸의 뒷모습에 대고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소리를 지르는 일 밖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게 문턱을 넘어 밖으로 울려 퍼지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꾸역꾸역 울어대는, 돼지 울음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어슴프레 저녁노을이 지면서 마을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광동 정육점에 불이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정육점을 찾고 있었다. 어둠 속, 반짝이는 간판 없이도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사람들은 조그마한 고기가게를 잘도 알아내었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정임이 아니냐?”
“예. 안......안녕하세요.”
“아이구, 그새 많이 컸네? 못 알아볼 뻔했지 뭐냐? 벌써 가게문 닫은 거여?”
“아뇨, 들어가보세요.”
가게 옆으로 붙은 담벼락을 끼고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정임에게로 말을 걸어왔다. 두툼한 지갑을 이고 오는 폼이 영락없이 정육점을 찾는 터였다.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스레 걸음을 띄던 찰나 부닥친 안면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정임은 어둠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아이고, 불도 안 키구선 뭐하는 것이여? 어디 상처(喪妻)한 사내놈이라도 숨겨 둔 거여?”
“방금 정임이 나가는 거 봤남요?”
“으응? 그려, 어딘가 급하게 가는 것 같던디...... 도야지 목살로 두어근 만 주. 아, 서울서 아들놈이 안 왔당가.”
올해 칠순을 넘겨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게 잔치를 치룬 방앗간 집 노인은 허리를 힙겹게 가누며 의자 위에 몸을 앉혔다. 몇 십 년간을 오직 하나 있는 아들 위해 쉼 없이 가래떡을 뱉어내더니 결국은 복을 받는 것이라며 잔칫날, 사람들은 입에 침이 닳도록 아들 내외 칭찬을 내뱉곤 했었다. 주인 여자는 냉동고에서 얼마 남지 않는 고기를 꺼내 쓱쓱 두 어 번 자르기 시작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덥썩 집어 후련하게 칼집을 내었을 솜씨에 왠일로 기운이 딸렸다. 오늘따라 그녀의 유난히 쭈글쭈글한 손마디가 더없이 푸석해 보였다.
“아, 우리 아들 자석 놈이 이렇게 이놈 치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도 그랬싸서 혹시나 벌써 문 닫았음 어쩌나 했는디.... 안 닫고 이래 있으니 얼마나 반가울꼬.”
“좋으시겠어요, 아드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아이고, 부러울 것도 따로 없다! 혼자 사는 늙은이, 어쩌다 한번씩 와 살았나 죽었나 확인하고 가는긴데..... 진짜 내가 부러운 것은 자네여. 정임이가 저렇게 항상 옆에 있으니 얼마나 의지가 될꺼여. 그새 참 곱게 컸드만, 벌써 이리로 온지도 일년이 넘었쟤? 언제까지 이렇게 끼고 살건가?”
나이가 무엇인지, 어느새 정임이는 모든 사람들이 확연히 알아 볼 만치 몰라보게 자라 있었나 보다. 헌데, 그도 엄마라고, 자신이 왜 그것을 모를 것인가.
노인이 고기를 사 들고 가게를 나간 지 한참이 되어서도 정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주인 여자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가게문을 닫았다. 부시럭거리는 뒤척임에 어슴 프레 눈을 떴을 때, 마지막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자신의 옆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닭은 새벽 3시, 마지막 닭은 새벽 5시에 한번. 그렇게 닭은 주인 여자의 자명종 시계와도 같은 귀중한 존재였다. 한번 뒤척이니 좀체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잠을 청했지만, 몇 일전부터 짓눌러 오던 두려움이 새벽녘의 공기와 함께 자신을 엄습하여 오한을 느끼게 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대청마루로 나왔다. 아직 푸르스름한 안개가 마당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차라리 다 갖다 내다 팔아 버려! 저 수십 마리쯤이면 한 밑천 나오고도 남을 거요!
때려잡아 죽여도 시원찮을 그 놈은 그 후로 다신 정육점에 고기를 대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칼부림을 하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어느 배짱 좋은 놈이 다시 찾아 들겠는가. 허나, 주인 여자는 알았다. 번쩍, 하며 빛이 일던 오씨의 눈동자를. 이미 스무 해 전에 보아버린 뒤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두었던 그 눈동자를. 자신을 잘도 잡아먹던 그녀 평생 단 하나의 남자, 그녀로 인해 자신의 몸뚱이를 잘도 살찌우던 돼지 같은 사내!
달빛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다고 느끼는 순간, 여자는 정신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에서 다 타 버린 재를 끌어 담기 시작했다. 창고에 우두커니 남아 있는 찌그러진 은빛 양동이에 여자의 눈동자가 비춰졌다. 그 눈 속에 이해하기 힘든 모정(母情)의 끈끈함이 자리를 틀고 있었다. 양동이 위에 까만 재를 묻은 여자는 그 위로 사정없이 물을 들어 붙기 시작했다. 이 조그마한 시골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작스런 사건을 두고 새벽은 단지 침묵으로 지켜 볼 뿐이었다. 끙, 하는 신음으로 양동이의 물을 가늠한 여자는 다시금 허리깨에 힘을 주어 그것을 덥쑥 들고는 곧장 우리로 달려들어갔다. 다 죽여야 하는 것이여, 죽어라. 죽어! 차라리 다 죽여 버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낯 동안의 운동에 고단한 몸을 잠재우던 돼지들이 소란스러움에 한 마리, 두 마리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주인임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그들은 적당한 방어태세로 정신없이 물러서고 있었다. 우리 안에서 사방으로 흩어지던 녀석들은 울타리 끝까지 몸을 뒤로 물렸다. 주인 여자를 원의 구심점으로 그것은 마치 하나의 큰 원과도 같았다. 군데 군데 볼품없이 찌그러져 형체를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원의 형상이었다. 희부연 살덩이들이 한데 엉겨붙어 요동치는 본능의 향연.
그녀는 둥그렇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덩어리에는 아랑곳없이 오직 처음부터 표적에 들어온 한 놈만을 집요하게 따라 붙고 있었다. 온통 돼지 오물을 덮어쓴 그녀의 맨발과 산발(散發)한 머리, 그리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점차로 밝아오는 아침 앞에 처참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데없는 주인의 발악에 그들은 쉼 없는 목청을 자랑하고 있었다.
“죽어버려, 이것아, 죽어 뒈지란 말이다!”
“어......엄마! 뭐하는거야, 지금! 제정신이야!”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돼지 울음에 정신없이 뛰어나온 정임은 엄마의 두꺼운 팔뚝에 거진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제발 잠이 덜 깨었기를 바랬다. 이것은 꿈이다, 꿈 일 것이다. 그래, 꿈. 한순간의 엄청난 악몽. 깨어나면 머릿속이 몽롱한 하룻밤의 백일몽 같은.....
“이거 놔! 이년아! 그려! 너도 도망가거라! 다 떠나 버려!”
“대채 왜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엄마 정말 미쳤어!”
아무리 억척스러운 여자라 할지라도 딸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어미의 본성인지라 곧 그녀는 우왁스럽게 돼지 입을 벌리던 양손을 풀썩, 땅 아래 내려놓고 말았다. 동시에 모녀의 몸은 그 반동력으로 인해 한바탕 우리 위를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한켠으로 양잿물동이가 쏟아져 흥건히 지푸라기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것은 백일몽, 깨고 나면 정신이 멍해지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백일몽. 그리하여, 이제 고요해 졌으니 곧 끝이 나리라. 나리라.....
“그려, 니 년 소리가 맞는 것인지도 모른갑다. 이 몸의 몸뚱아리, 미친년이 맞는 것이여.”
“......”
“맞는 소리쟤. 내 배 따숩다고 이놈들을 하루에도 수 마리씩 잘라 내는걸 보면, 나도 참 모질지, 미치지 않고서야..... 안 그러겄어?”
이제는 돼지들도 진정이 되었는지 둥글게 핀 원을 깨고 한쪽 구석에 자리를 틀어 앉는다. 그래도 아직 나즈막히 신음소리를 내뱉는 걸 보면 경계를 풀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애미는, 그려! 내 비록 한갓 푸줏간 집 여편네지만, 나는 고기를 파는 게 아니였다. 진절머리 나게 정육점 딸이란 소릴 달고 살믄서도 내가 이일을 포기 못한 건 그 때문이여. 피비린내가 나는 벌건 살덩이를 맛나게 잘라 가 사람들한테 돌려주는 거, 밥 한끼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도와주는 거. 구수한 고기냄새가 진동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으니께. 다른 게 아니여, 바로 그런게 행복이여. 그랴, 살다 봄시 살 냄새가 지긋지긋 헐 수도 있겠제, 내 그 기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디 다 자기가 하것자고 하는데로만 쫓아가면 그것이 행복인 줄 아냐. 그래도, 그래도 니년 욕망은 다스릴 줄 알아야쟤. 왜 그거를 모르는 게여! 대채, 왜! 어흐흐....흐흑. 왜......왜!”
여자의 울음소리가 낮은 울타리를 뛰어 넘어 새벽 하늘을 갈랐다. 눈물과 뒤 섞여 이마 깨에 착 달라 붙어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 곁에 앉아 어미의 팔을 놓지 않는 정임의 손처럼 끈덕졌다. 그 끈끈함으로 두 모녀는 서로를 껴안고 한바탕 질펀하게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커다란 몸뚱아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꿈이었다. 행복을 모르던 어느 딸아이의 하룻밤 악몽. 깨어야 하건만 정임은 더더욱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아무리 엄마의 모든 걸 이해한다 해도 이 현실만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끊임없이 세어나오는 욕망을 억누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면, 아무 것도 보지 않을 수 있으려나. 그럼 엄마의 초라한 몰골과 측은히 자신을 바라보는 저 돼지들을 보지 않을 수 있으려나.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정임은 흐르는 눈물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넓다란 도마 위로 회 빛 칼날이 번뜩이며 내리 꽂혔다. 여름은 이제 마지막 발악, 이별을 고하는 한차례의 폭염을 쏟고는 시원한 장대비로 계절의 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퍽퍽-
도마 소리가 시원스런 빗줄기와 박자를 타며 삐걱대는 가게문의 소음을 먹어버린다.
“어디 보자, 정임아, 고기 다 재어놨니?”
“엄마가 하라는 데로 했는데.....맛이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아직도 아프시니?”
“한 몇 일 더 쉬셔야 할 것 같아요. 허리를 좀 많이 다치셨거든요.”
아직은 자그마한 손바닥이 바구니 속의 고깃덩이를 꾹꾹 눌러 쟁인다. 장마로 인해 이제 피서도 한 풀 꺾여 일손이 뜸한데도 고것 몇 점 썰었다고 오른 팔이 얼얼하다. 서툰 손놀림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이 신통하게도 고기바가지를 내어 온다. 정임은 윤 새댁의 간절한 눈빛에 미심쩍은 듯, 다시 한번 고기의 간을 맛보고 있었다.
“......대충 간이 베인 것 같은데, 비 맞지 않게 뭐라도 좀 씌워 드릴까요?”
“그래 줄래? 하여간에 날씨가 안 좋다구 그리 말려도 끝내 오신다는 구나. 내 원, 아들이 뭔지. 그나저나 이놈의 비는 좀체 그칠 줄을 몰라서야.... 오시는 길 별 일 없으셔야 할 텐데 걱정이네.”
입안에서 맴도는 윤 새댁의 중얼거림이 빗속으로 사라져간다. 고깃덩이에 빗물이 떨어질세라 한껏 신경 쓰며 우산을 드는 새댁의 부산함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정임은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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