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을 잃어버리고 여성의 권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제시대였지만,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여인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하란사’였다.

하란사는 1875년 평양에서 태어나 인천별감으로 있던 하상기와 결혼했다. 남편의 직업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하란사는 일찍이 일본ㆍ중국을 통해 개화된 서구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당시 하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하려 했지만 기혼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있던 룰루 프라이를 찾아가 입학을 부탁했다. 노력을 거듭한 끝에 1896년 하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했고, 어린시절 ‘낸시’라고 불리던 이름을 ‘란사(蘭史)’라는 세례명으로 개명하게 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배움의 열정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란사는 남편이 고위직에 오른 후 경제적으로 부유해지자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됐고 약 1년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2년, 하란사는 미국 웨슬리안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게 되고, 한국 여성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귀국한 그는 1906년 상동교회 안의 영어 학교 교사직을 맡아 불우한 환경의 여인들을 교육했고, 1910년 9월에는 이화학당에 신설된 대학과에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임용됐다.

新(새로운)여성이지, 臣(섬기는)여성이 아니다!
그 당시 사회의 지도급 인물이었던 윤치호와 하란사의 교육 논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1911년 7월경, 윤치호는 영문으로 발행되는 선교 잡지에 한국에서의 여성 교육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는 ‘신학교의 학생들은 요리하는 법을 모른다. 바느질 하는 법, 집안 살림하는 법도 모르며 가끔은 시어머니에게도 순종치 않는다’며 신여성 교육을 비판했다. 이에 분노한 하란사는 ‘신여성 교육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와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라며 신여성 교육의 방향성을 제고하는 글을 올렸다. 이렇게 하란사는 억압받는 일제 강점기 속에서도 새로운 여성상을 피력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민족애가 가득했던 열혈 여인
또한 하란사는 민족운동에도 열성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이화학당 교사로 있던 이성회가 조직한 학생 자치 단체 ‘이문회’의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고종은 한ㆍ일의정서 등 일방적인 외교 문서 원문과 외국 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조선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 했고, 이러한 중대한 임무에 하란사가 발탁됐다. 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게 되면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1910년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으려는 하란사의 노력과 시도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하란사는 고종이 승하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 간 목적이 무엇인지 채 밝혀지기도 전에 그는 그곳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회에서 독살을 당해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검은 갓에 기다란 검정 새털 깃을 꽂고, 검정 원피스를 즐겨 입었던 여성’으로 기억되는 하란사. 역사속의 당당한 신여성으로 기억되는 하란사는, 오랜 관습과 전통을 깨치고 여성의 해방을 몸으로 보여준 개화기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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