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하게 되기 전까지는 어떤 여성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피임약 개발자이자 산아제한운동의 제창자 마가렛 생어(1883~1966)의 말이다.


피임약은 20세기 최대 발명품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일궈냈다. 이것의 발명은 마가렛 생어가 간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겪은 한 일화에서 비롯된다. 마가렛 생어는 병원에 실려 온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를 만나게 됐다. 그 여성은 여의치 않는 경제사정으로 인해 아이 갖기를 거부했으나 원치 않는 임신을 했고, 스스로 유산을 하려다가 병원에 왔다. 그는 피임법을 몹시 알고 싶어 했지만 당시에는 피임이 법으로 금지돼있었기 때문에 간호사였던 마가렛 생어는 알려줄 수 없었다. 그 여성은 또 다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유산을 시도하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됐다.


이와 같은 사례는 단지 마가렛 생어가 만난 그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가렛 생어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미국인 사망 원인 1위는 결핵이었으나 14~54세의 여성은 출산 중 사망하는 경우가 결핵보다 더 많았다. 계속되는 빈곤과 다산으로 인해 죽어가는 여성들을 마가렛은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통제하도록 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을 피임약 개발과 산아제한운동에 투신했다. 그는『산아제한평론』을 통해 피임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고, 산아제한 진료소를 설치해 많은 여성에게 피임법을 전수했다. 그는 공안 질서 방해죄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그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었다. 1927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인구문제 회의를 통해 국제산아제한기구가 결성됐고, 1939년에는 의사들의 피임처방권이 법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1960년 마가렛 생어는 과학자들과 함께 먹는 피임약 개발에 성공했다.


오늘날, 피임약의 보급으로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과 육아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피임은 마가렛 생어가 불러일으킨 세계적인 여권 신장의 ‘나비효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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