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낙희(국어국문 전공, 68졸) 교수
성낙희(국어국문 전공, 68졸) 교수와 숙대신보와 인연은 1963년, 고3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대신보가 주최한 제 1회 전국 여고생 현상문예작품 모집에 소설이 당선된 것이다. 이듬해 숙명여대에 합격한 성 교수는 그 때의 여고문학상을 주최했던 ‘숙대신보’의 문을 두드렸다. “숙대신보 기자는 그 당시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인기가 많았죠.” 숙대신보 기자 선발과정은 영어ㆍ상식ㆍ기사쓰기ㆍ면접 등 까다로운 전형임에도 지원자는 250여명에 달했다. 성 교수는 모든 시험 절차에 최선을 다했고, 숙대신보 수습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당시 숙대신보사 편집국은 2층 목조건물인 별관(현재 수련교수회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자실과 주간ㆍ행정실이 분리돼 있는 지금과는 달리, 교실 하나 반 정도 크기의 편집실에 책상을 놓고 주간교수, 편집국장, 업무국장, 기자들이 함께 작업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신문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취재, 편집 모두 엄격히 지도를 받았었지요. 짧은 보도 기사도 완벽해야 했어요. 밤늦게까지 손으로 일일이 원고지에 기사를 적었고, 활자를 채자해서 인쇄했기 때문에 조판하는 날까지도 힘들었지요.”

당시에는 신문에 한문이 혼용됐기 때문에 한문과 관련된 오ㆍ탈자가 많았다. “교수님들 성함의 한자가 서로 바뀌는 해프닝도 있었어요.” 당시 주간교수였던 한규동(성악 전공, 1996년 별세) 교수는 신문이 나오면 돋보기를 쓰고 직접 기사의 오ㆍ탈자를 검사했다고 한다.

성 교수는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냈던 동기, 선ㆍ후배 기자를 ‘숙대신보 식구’라고 불렀다. “국문과, 영문과, 경제학과 등 여러 학과 학생들이 모여 서로 언니, 동생 그랬어요. 그렇게 우애가 좋게들 지냈지요. 신문편집을 안 할 때도 책상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습작도 하고 그랬어요.”

한편 가난했던 60년대 시절, 숙대신보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가져갈 수 없었다. 매주 신문이 나오는 날 아침, 과대표들이 서명을 하고 학과 재적 인원수만큼 신문을 받아갔다. “다른 대학친구에게 숙대신보를 보내주고 싶으면 돈을 주고 사야했지요. 그 때 숙대신보는 귀해서 모두들 애지중지 했었어요.” 매체가 거의 없었던 그 당시의 학생들에게 숙대신보는 중요한 읽을거리였던 것이다.

숙대신보는 학교의 이념ㆍ학술ㆍ문화 전반을 가늠하게 하는 학교의 얼굴이자, 고향의 부모님ㆍ모교ㆍ남자 친구등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이기도 했다. “신문에 자신의 글이 실리면 지인들에게 보내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반대로 그 글을 쓴 학생에게 팬레터가 오기도 했지요. 그런 역할도 했었어요.”

숙대신보의 기자 출신인 성 교수는 1994년 주간교수로 다시 숙대신보사에 돌아왔다. “63년에 시작된 여고문학상이 언제부터인가 중단이 됐었어요. 그래서 여고문학상을 부활시켰지요. 그동안 숙대 신보에 실렸던 사설 가운데서 엄선해서 사설집 ‘길을 두고 어디로 가는가’를 출판했고, 범 대학 문학상 수상 작품집도 발간했었어요”라며 여고문학상 수상작들도 책으로 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가 그 때 부활시킨 여고 문학상은 올해로 13회를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보관용 신문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신문을 모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종이로 된 신문은 나이를 먹으면, 누렇게 변색 될 뿐만 아니라 마른 꽃 잎 마냥 쉽게 바스라지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든 신문은 나이를 잊은 채 숙대신보 자료실에 보관돼있다.

“지금의 숙대신보는 참 예뻐요. 그런데 너무나 정교해서 규격화된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가끔은 잡지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렇지만 성 교수는 예전에 비해 신문 구독률이 낮아진 점이 무척 안타깝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신문이 중요한 정보원이었어요. 문예작품도 학생들이 직접 투고를 했고, 그 중에서 선택해 신문에 실을 정도였으니까요. 학생들이 많이 동참하는 신문이 돼야하는데 말이에요. 지금은 그렇지가 않지요. 좀 더 노력해야 할 거에요.” 그는 학생기자 때가 박진감이 넘치던 시절이었다고 말하며 지금보다 좀 더 현장감 넘치는 신문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4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성 교수는 처음 숙대신보 기자 시절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성 교수는 숙대신보에 대한 애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난 지금도 숙대신보 열심히 읽어요. 앞으로 숙대신보가 정론ㆍ직필,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열린 신문이 됐으면 좋겠어요.”

노경진 기자 smpnkj75@sm.ac.kr

민유경 기자 smpmyk75@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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