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 원’ 세대로 일축되는 지금의 대학생들. 학생들은 한 해에만 천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해결하고자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경우 또한 늘어나고 있다. 더구나 청년실업자 130만 명이라는 통계는 당장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취업에 대한 고민은 불안감만 깊어지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이 과연 우리만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성차별과 부족한 스펙, ‘졸업반 취업준비 시급하다’
70년대 우리 숙명인들에게 취업 문제는 조금 다른 고민이었다. 1978년 6월 1일 자 592호 숙대신보 1면에 실린 ‘졸업반 취업준비 시급하다’ 기사는 당시 졸업생들의 저조한 취업률의 원인을 끄집어냈다.
1977년은 경제 호황으로 96.4%의 유례없는 취업률을 기록했지만, 우리 학교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26%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졸업생 944명 중 대학원 진학(21명), 결혼(48명)을 제외하고 총 246명만이 취업을 한 것이다.
숙대신보는 이렇게 낮은 취업률을 보이는 원인으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남성에 비해 여성 채용 비율이 현격히 낮았던 것은 기업들이 일을 잘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는 당시의 보편적인 고용 환경이었다.
또한, 당시 취업한 졸업생 중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교사로, 취업한 졸업생 전체의 40%에 해당했다. 이밖에 사무직 28%, 스튜어디스 5%, 언론계 3%의 비율을 보였으며 기타(조교, 디자이너, 비서, 영양사 등)가 16%를 차지했다. 통계에서 알 수 있듯 당시에는 여성의 직업군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지금만큼 활발하지 못했던 시대에서 이와 같은 직업분포는 당연하였다.
한편, 숙대신보는 당시 기업에서 요구하던 타자와 어학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는 등 학생들의 실력이 부족했다는 것도 숙명인의 낮은 취업률의 원인으로 꼽았다. 결국, 이러한 복합적 원인이 우리 학교 학생들의 취업문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107일간의 투쟁, ‘총장 등록금동결 발표’
80년대의 숙명인들에게도 등록금은 학교와의 갈등을 빚은 문제였다. 1989년 3월 23일 자 숙대신보 787호 1면에 실린 ‘총장 등록금동결 발표’ 기사는 당시 학생들의 적극적인 투쟁 과정과 학교의 모습을 실감 나게 전했다.
전년도보다 7.2% 인상된 등록금에 대해 학우들은 보름 동안 총장실 점거농성과 수업거부, 5일간의 단식농성 등 지난 12월부터 총 107일 동안 등록금동결투쟁을 벌였다. 당시 전체 재학생의 1/3인 2,000여 명의 학우들은 등록금동결투쟁집회에 참가하고,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수업거부를 결의하는 등 등록금동결투쟁운동에 높은 참여율을 보였다. 투쟁운동에 참가한 일부 학생들은 전투경찰 50여 명과 대치하기도 했으며, 등록금동결투쟁위원장을 비롯한 등록금동결투쟁위원 7명은 단발식을 거행하기까지 했다. 긴긴 투쟁의 결과 마침내 수업 거부와 점거 농성을 철회한다는 조건으로 교수회의에서 작성된 결의문을 발표하고 등록금을 작년 수준으로 유지하겠다는 등록금 동결을 발표됐다.
학우들은 등록금동결 발표뿐 아니라 등록금책정협의회를 상설기구화 시킨다는 조건 또한 학교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신입생이 등록금동결 대상에서 제외된 점을 새 쟁점으로 부각시키며 등록금동결투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목소리를 드높여 나갔다. 당시의 우리 숙명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정당히 요구할 줄 알았으며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였다. 이는 정숙하기만 했던 우리 숙명인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현재에는 과거에 비해 학생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일이 드물지만, 당시에는 암울했던 시대 환경에 의해 이러한 투쟁운동이 보편적인 분위기였다. 투쟁운동은 학생의 신분에서는 다소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러한 운동은 당시 대학생들의 순수와 열정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이 때를 '아련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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