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당시 무용은 기생이나 무당, 광대들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있었기 때문에 예술로써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무용은 특정 몇몇 사람들이 서구식 극장인 ‘원각사’에 오르내리면서 판소리 사이사이에 춤이나 승무, 검무를 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뿌리가 허약했던 우리나라 무용계에 ‘최승희’가 등장했고 그는 이전시대의 무용이 예술로써 추앙을 받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친오빠의 권유로 경성공회당에서 일본 현대 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게 됐고, 이 일을 계기로 이시이 바쿠의 연구생이 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듬해 그는 이시이 공연단과 함께 신작발표회를 열어 승무ㆍ칼춤ㆍ부채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해 사람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그 무렵 그의 춤은 일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최고의 ‘조선인 여성 무용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가 췄던 우리의 춤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한국인에게는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었던 반면, 일본인에게는 문화적 열등감을 주기도 했다. 최승희의 춤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과 문화말살에 대한 항의의 수단이 된 셈이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한국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했고, 국내 최초로 한국무용을 공연했다. 그가 창작한 한국무용은 서양의 현대 무용의 기법과 우리 춤의 요소를 융합한 것으로 동양 춤의 특징인 신비로움과 서양 춤의 특징인 역동성을 접목시킨 것이다. 또한 그 전까지 일반인들이 무용을 보려면 술집으로 가야했지만 최승희의 공연은 예술극장에서 예술로써의 무용을 경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또한 최승희는 자신을 ‘코리안 댄서’라는 이름으로 2년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순회공연을 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댄서로 오해받기 싫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는 공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이 동방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문화적 외교사절단의 역할까지도 수행했다.
그러나 해방 후 일본군의 위문공연을 했던 그의 경력이 친일 행위로 평가돼 남한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됐다. 그는 먼저 월북한 남편을 따라 1947년에 월북하게 되지만 북한에서의 그의 삶 또한 결코 순탄치 않았다. 월북 한 후에도 수많은 공연을 했지만 그의 무용이 주체예술사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용계에서 제외됐고 얼마 후 그는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처럼 조선이 낳은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는 어두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예술을 창조해낸 여성이었다. 평생을 무용연구와 공연활동에 매진했던 무용가 최승희. 그는 식민지 정치 현실에서 허덕이며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던 백성들에게 ‘민속춤’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줬고, 그의 아름다운 춤사위는 동양의 신비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무용가 최승희는 무용으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전 세계에 알린 ‘전설 속의 무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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