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 쯤, 신문에 실린 만평을 보고 웃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근엄한 표정으로 연설을 하던 정치인들이 만평 안에선 한껏 우스꽝스런 꼴들을 하고 있다. 이처럼 풍자만화는 주로 정치인들의 부정을 날카롭게 꼬집으며 우리에게 통쾌함을 안겨준다. 그리고 여기, 혼란의 19세기 프랑스를 살아가던 이들에게 시원한 웃음을 선사한 ‘풍자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도미에는 정식 학교 교육과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거리로 나와 파리 시민들의 삶을 관찰하며 스스로 배움을 얻어나갔다. 도미에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법률사무소의 급사, 서점 점원 일을 했지만 그림을 향한 그의 열망은 더욱 커져갈 뿐이었다. 마침내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는 화가 밑에서 교육 받을 기회를 얻었으나, 고전적 미술 기법에 염증을 느끼곤 이내 배움을 그만뒀다.
그 후 가난한 거리 화가 생활을 하던 도미에는 풍자 신문에 만화를 기고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왕정복고 후 혼란스럽던 당시 프랑스의 세태를 비판하는 정치 풍자만화를 그려 화가로써의 삶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적나라했던 도미에의 그림들은 국왕 모독죄로 고소됐고 그는 6개월간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감생활이 끝나고 도미에는 정치인들에게서 가난한 민중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부르주아와 귀족의 횡포로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한층 더 신랄해진 풍자로써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이처럼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도 오직 민중만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도미에는 71세의 나이로 가난한 풍자만화가로써의 삶을 조용히 마쳤다.

도미에는 풍자 신문에 만화를 기고하면서 수위 높은 정치 풍자만화들을 무수히 그렸다. 그 중 《가르강튀아》(그림①)는 도미에가 국왕 모독죄로 투옥될 때 고발됐던 풍자만화 중 하나이다. 라블레의 소설에 나오는 식욕 왕성한 왕 가르강튀아는 당시의 국왕 루이필리프를 상징한다. 가르강튀아의 혀로 민중에게서 수탈한 재화들이 운반되면, 재화는 국왕을 살찌운 뒤 변으로 배설돼 국회의원들에게로 분배된다. 이 풍자만화로 도미에는 탐욕스러운 지배계급의 부패와 착취를 비판하고자 했다.

또한 도미에의 걸작으로 꼽히는 《삼등열차》(그림②)는 그가 가난한 민중들의 애환까지 그림에 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삼등열차의 어두운 객석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과 퀭한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노파의 모습, 빼곡하게 붙어 앉아 있는 승객들이 보인다. 그는 마차에서 가장 값싼 객석이었던 삼등열차 안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직접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침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저 뒤편에는 권력에 억눌려 비겁한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도미에는 달랐다. 그는 용기 있게 모순된 사회를 향해 쓴 소리를 아니, 쓴 그림을 던졌다. 비록 그는 빈곤한 삶을 살았으나, 그가 남긴 역사의 산실들은 보석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남궁가람 기자 smpnkgr75@sm.ac.kr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