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여수행 무궁화호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여수행 열차를 타시는 고객분들 께서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기자는 여수행 마지막 열차에 올라탔다. 지난 7월 31일, 폐암으로 타계하신 소설가 故이청준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전남 장흥이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남도로, 남도로 향했다. ‘선생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슴속에는 몸 둘 바를 모르는 한마디가 벌써 장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진목 마을의 입구에 다다르면, 이청준 생가를 가르키는 현수막을 볼 수 있다.
기차와 버스 갈아타기를 여러 번, ‘진목마을’이라고 쓰인 커다란 돌을 지나치니 버스의 종점인 진목마을회관 앞에 다다랐다. 진목마을은 故이청준 선생이 1939년 태어나 1954년에 광주서중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故이청준선생은 살아생전, 진목마을을 찾은 손님들에게 자신의 작품 중 3분의 1은 소년시절의 고향을 베낀 것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고향을 바탕으로 도시 속의 삶은 그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기억에도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일흔 살이 될 때까지도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냈을까.

“울기만 했겄냐...”

이청준 자료실, 소설 들과 당시 사용하던 생활용품 등 아늑하게 복원된 생가를 돌아보고, 어른들이 앉아계시던 마을회관으로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서울에서 온 학생들이라고 인사드리고, 무작정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그 자리에는 몇 년 전 이청준생가를 복원하는 작업을 할 당시, 진목마을의 이장이었던 오세준씨가 함께 있었다. “이청준씨는 국민학교를 여기서 졸업하고 중학교를 광주서중으로 가셨구마. 그 사이가 ‘눈길’이여.”

노인의 말마따나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내가 미끄러지면 노인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 노인이 넘어지면 내가 당신을 부축해 가면서, 그렇게 말없이 신작로까지 나섰다...(중략)...나는 차를 타고 떠나가 버렸고, 노인은 다시 그 어둠 속의 눈길을 되돌아선 것이다. - 소설 「눈길」중

▲ 이청준 선생의 탄생 당시의 생가를 복원한 모습
故이청준의 소설 「눈길」은 휴가를 맞아 ‘나(주인공)’와 아내가 고향에 찾은 사연을 그리고 있다. 남남처럼 살아온 노모에게 빚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지붕개량을 원하는 노모의 부탁을 모른척 한다. 그리고 고향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아내는 노모에게 아들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밤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고, 우연히 엿듣게 된 ‘나’는 노모의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오세준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은 나즈막히 “청준네 아버지는 부자였어. 그래서 광주로 학교를 갔제. 중ㆍ고등학교 때까지도 집이 굉장했었구마.”하고 읊조리셨다. “난 중학교갈 때 망한지 알았네? 형이 술로 집을 망해먹었거든. 어린마음에 상처받을까 그 사실을 알리면 안되겄고, 집은 망해서 팔아 묵었고. 그래서 에미가 사실을 숨기고, 하룻밤 재우고 서중으로 보내는 건지 알았는디” 오 씨는 무릎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때 그 시절, 눈물을 머금고 걸어야 했던 눈쌓인 길은 아직도 건재할까. 2004년에 이청준생가를 복원한 이후, 「눈길」의 배경이 되는 길도 복원하려고 한다는 뉴스를 읽었던 바 있는 기자는 그것에 대해 물었다. “그 길이 여그 뒷산에서 대덕국민학교로 넘어가는 길이여. 국민학교까지는 산넘고 산넘어 6km정도 되는 거리였고. 지금은 마을 입구쪽에 회진초등학교가 생겨브려서 그 쪽 길은 나무로 덮혀버렸구마.” “그땐 참 눈이 많이도 왔제…” 한 할머니께서 말끝을 흐렸다. 오 씨는 “말만 복원한다 하지, 영화세트장이나 생가에도 사람들이 많이 안 오는디 돈 들여서 산길을 복원하것어? 말처럼 쉽지 않구마이”라고 말했다.

▲ 이청준 생가에 들어서면, 이청준에 대한 이야기와 간단한 연표가 적힌 안내표지판이 있다.
마음을 두고 떠난 고향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조금 낯익은 할아버지 한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어디서 온겨?” “서울에서 왔어요” “잘 만났구마. 내가 청준이 사촌형이여. 머리 보면 알제?” 하며 모자를 벗은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은 故이청준 선생처럼 눈처럼 하얀색이었다. 4살이 많은 형이지만, 학교는 같이 다녔다고 말해주신 어르신께서는 故이청준 선생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어렸을 때부터 청준이는 머리가 좋아가지고, 선생이 강의를 하면 머리에다 입력 시켜부려. 그랑께 국민학교 다닐 땐 공책에다 필기도 안 해. 다 외워버렸지.” 바닷가 마을에서 얼마나 총명했는지, 故이청준 선생은 그 당시 전남은 물론 전국에서 유명했던 광주서중학교로 진학했다. “가는 공부로만 대학갔지. 중학교때부터 가정교사 하면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광주에서는 여그서 대학다니면 다 대준다고 여 있으라 했는데 필요없다카고 서울로 가부렸다. 완전히 능력으로만 서울에 간게지.” 故이청준 선생은 그렇게 광주서중, 광주제일고를 거쳐 서울대 독문과에 진학했다.

“근디 청준씨가 고향을 왜 그리 안 왔을까?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고 말여. 집이 망했더라도 친구 있고, 동네 어르신들 있고. 그랑께 들려서 인사도 하고 그럼 되는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안 왔어. 나 이장 때 생가복원하고 영화촬영하고, 그 무렵부터 오기시작한거래이.” 기자 또한 그 점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서는 오 씨의 안내로 영화 <천년학>세트장으로 이동했다.

“나를 찾지 말라 하시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보게 될 것이었다. 장삼 자락을 길게 벌려 선학동을 싸안은 도승 형국의 관음봉과 만조에 실려 완연히 모습지어 오를 그 신비스런 선학의 자태를. 그리고 또 재수가 좋으면 그는 어쩌면 듣게 될 것이었다. 그 도승의 품 속 어디선가로부터 둥둥둥둥 포구를 울리면 물을 건너오는 산령의 북소리를, 그리고 그 종적 모를 여인의 한스런 후일담을……. - 소설 「선학동 나그네」중

영화 <천년학>은 故이청준 선생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는 이청준 선생의 연작 소설 『남도 사람』의 세번째 이야기로,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잇는 후일담이다. 「서편제」에서부터 의붓오라비는 그의 눈먼 소리꾼 누이를 찾아 헤매나, 누이는 여전히 종적을 알 수 없다. 의붓오라비는 누이를 찾아 「선학동 나그네」에 이르지만, ‘오라비에게 나를 찾지 말라 하시오. 나는 이제 이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 마리 학으로 남겠다 하시오.’ 라는 누이의 마지막 당부만 전해 듣게 된다. 故이청준 선생은 사라져가는 우리 것에 대한 한줄기 그리움으로 존재의 의미와 예술혼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시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영화 <천년학> 세트장으로 가던 오 씨는 “사진은 여기서 찍어야 제맛이겠고마. 어여 찍어봐” 하며 차를 세웠다. 눈앞에 펼쳐진 산자락에선 정말로 학이 날아가는 듯 했다. 아니, 날아야만 했다. 관음봉이자, 선학동이라 일컫어지는 그 곳이 故이청준 선생의 고향이어라. “<천년학> 봤어? 거기선 저 마을이 물로 꽉 채워서 나오는디, 컴퓨터로 한거드만. 촬영 할 때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디, 학도 날아 댕기고 말여.” 세트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담했다. 눈 먼 여인의 소리로 풀어내고 싶어 했던 응어리진 한恨이 왕래가 끊긴 빈 주막, 그 곳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이 되어버린 ‘어머니’

“영화 <축제>촬영도 여기서 한걸로 아는데, 촬영장이 여기서 멀어요?” “<축제>? 그건 우리 마을 이야기인디, 임권택 감독이 이상시레 남포에서 찍었드마. 용산면에 있어서 여기서 차타고 20분정도는 가야혀. 상여 메고 시작하는 첫 장면은 우리 마을에서 찍었제. 그거는 청준씨네 어머니 이야기고마. 죽어서 여기에 왔고, 살았다가 다시 죽었제.” 무슨 말일까 하며 생각을 거듭하던 기자는 결국 물음표를 찍고야 말았다.

故이청준 선생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어머니 상을 치르며 겪은 일화들을 임권택 감독에게 말했고, 그 사연을 전해들은 임권택은 그 자리에서 장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덕분에 故이청준의 소설「축제」와 영화 <축제>로 동시작업을 하게 됐고, 이는 영화역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보적인 작품으로 남게 됐다. 이야기는 노인이 세상을 뜨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집에 문상객들이 밀려들면서 돌변한다. 장례는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노름판과 윷놀이판,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로 가득 찬다. 이런 것들은 장례의 생생한 모습이며, 축제와 닮아있다. 故이청준 선생은 글 속에서 인간이 비로소 육신을 털고 신이 되는 마지막 통과의례가 장례이며, 그러므로 죽은이에게도 축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천년학> 촬영 중인 임권택 감독과 故이청준 선생

故이청준 선생은 생전에 “내 소설의 기둥은 어머니”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축제>의 노모처럼 아흔을 넘겨 치매를 앓았다. 아들 이름도 잊은 채 “손님 오셨구마, 우리집엔 빈방도 많으니께 편히 쉬었다 가시요” 하곤 했단다. 이 이야기는 시인 정진규가 ‘눈물’이라는 시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죽어서 여기에 왔다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의 죽음, 가정의 파산으로 고향을 떠나 방황하고 20년이 흐른 1980년 즈음, 고향에 겨우 돌아올 수 있게 된 그의 어머니. 소설 <눈길>로 다시 살아났다가, 그리고 죽음의 <축제>로 인간에서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그의 어머니를 말했던 걸까.

이청준 생가가 있는 전남 장흥의 진목마을, 故이청준 선생은 아랫동네 팽나무(「나무 위에서 잠자기」), 갯나들 앞바다(「침몰선」「석화촌」등), 마을과 집(「개 백정」), 회진초등학교(「돌아온 풍금소리」)등 마을 곳곳을 소설에 녹여냈다. 그리고 <서편제><천년학>을 비롯해 <밀양>(벌레이야기) 등의 영화로 각색돼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기전, 단 13년을 살았을 뿐인데 그의 가슴에는 고향이 전부였을까’했던 물음. 어스름이 짙어오기 시작하는 오후, 기자는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나근한 몸을 뉘고 있었지만, 마음은 장흥에 두고 온 것 같았다. 단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런 곳에서 13년이나 살았으니 ……. 포구에서 말리고 있던 물오징어만큼이나 늘어져버린 몸이지만, 어느새 장흥이 그리워 쉽사리 잠에 들 수는 없었다. ‘땅과 하늘이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 씨 소설이오.’ 생가 앞 마당의 문구를 떠올리고서야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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