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인천여자고등학교 김 현 정

작년 겨울,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집에는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방에서 혼자 공부를 하다 물을 마시러 나간 나는 식탁에 계신 엄마 옆에 앉았다. 

“공부 잘하고 있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공부를 잘 했는데도 대학에 못 간 사람도 있어.” 

엄마의 말에 나는 무심코 그게 누구냐고 했다.

 “엄마.”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그 때 엄마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내가 물어 볼 때 마다 엄마는 “더 크면 말해줄게.” 라고 한결같이 대답하셨지만 철없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는 것 많고 똑똑한 엄마가 대학을 안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나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와 단 둘이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엄마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무척이나 의아했지만 그 뒤로부터는 단 한번도 엄마에게 대학에 관련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나와 엄마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가슴 속에 한을 품고 있던 엄마와 그런 엄마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된 나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엄마는 고등학생이 되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장한 나에게 그동안은 내가 너무 어려서 해주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엄마가 대학을 가지 못한 이야기와 그로인한 엄마의 상처, 나머지 형제들에 대한 얘기 등. 5남매 중 막내였던 엄마는 무척 공부를 잘 하셨지만 집안 형편을 알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큰 외삼촌께서는 그나마 편안히 대학을 다닐 수 있었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을 버리지 않으셨던 작은 외삼촌께서는 힘든 대학생활을 하셔야 했고 사범대학에 들어갔던 큰 이모께서는 대학 생활을 중간에 포기하셔야 했다. 본인 또한 다섯 남매를 낳으신 큰 이모께서는 큰 이모부의 사고로 혼자서 생활고를 떠맡으시게 되었는데 그대로 대학을 다니면서 계속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다면 지금처럼 힘들게 일하시지는 않았을 큰 이모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실업계 고등학교에도 공부 잘하는 사람이 많았어. 우리는 전혀 창피해 하지 않았어. 오히려 자랑스러워했지.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어려움이 많더라. 하지만 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아. 보내기 싫어서 안 보내신게 아니니까.”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새 학기면 언제나 써가던 기초생활 조사용지에 엄마는 항상 대졸로 표시하셨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엄마 친구 얘기를 들으니 부모님의 학력에 따라 아이를 다르게 보는 선생님도 있다더라. 혹시나 네가 안 좋은 시선을 받을까 싶어서 항상 대졸로 표시했지. 그 친구는 그 다음번 조사 때에는 대졸로 표시했는데 그 친구 아들은 친구가 잘못 표시한 줄 알고 찍찍 긋고 고졸로 표시했다더라. 너도 그럴까봐 더 일찍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엄마의 학력으로 인해 혹여나 내가 안 좋은 시선을 받을까 걱정하신 엄마. 그래서 매년 학력을 바꿔 쓰신 엄마를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 후 그동안 몰랐던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유난히 나와 동생의 학업에 열정을 쏟으셨다.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여러모로 신경 쓰시고 혹시나 엄마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흐트러질까 염려되어 아빠 혼자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벅차도 늘 집에 계셨다. 아빠 또한 그런 엄마의 생각에 동의 하시고 아빠의 직업으로 인해 이사를 다녀야 할 때에도 항상 우리의 교육환경을 먼저 신경 쓰셨다. 나의 18년 세월이 부모님의 사랑과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공부해라, 공부해야지, 끝없던 엄마의 잔소리는 이제 더 이상 잔소리가 아니다. 그러한 말들 속에는 엄마의 수 십년의 한과 나만큼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하고픈 엄마의 사랑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

 엄마의 삶 곳곳에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와 닿아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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