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야무지게 생긴 한 학생이 숙명여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애교심이 강하고 매사에 열심이었던 그는 총학생회장으로 뽑혔으며 졸업식 때 전체 수석 졸업이라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는 우리 학교 교수를 거쳐 제13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지금, 그는 총장으로서 마지막 2개월을 남겨두고 있다. 그는 바로 지금의 우리 학교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경숙 총장이다. 입학부터 총장 퇴임까지 우리 학교와 동고동락하며 지낸 46년의 세월을 이 총장에게 들어봤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50여 년을 우리 학교와 함께 했으니까 참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네요.” 이 총장은 숙명과의 시간을 떠올리며 첫 운을 뗐다. “생각해보면 우리 학교와 함께 지낸 나날들은 모두 감사한 것뿐이에요. 내가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과, 내가 만났던 사람들, 무엇보다 후배이자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보람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총장으로 지낸 14년을 반추하며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는 우리 학교 구성원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별은 혼자 빛날 수 없는 것처럼 항상 나를 지지해주고 받쳐주는 사람들 덕분에 저 또한 빛날 수 있었죠. 아무것도 모르는 18살짜리 학생이 우리 학교에 들어와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땅과의 악연, 제2창학의 기적


이 총장이 처음 총장으로 취임했던 당시는 ‘유난히 땅과 악연이 많던 나날들’이었다. 해방 후, 기존의 우리 학교 땅이 공원부지로 귀속되고 우리 학교는 땅을 임대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취임하자마자 제게 주어진 것은 7억 8천여만 원의 세금 고지서뿐이었어요.” 각종 고지서로 빚더미에 앉은 가난한 학교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총장은 “돈이 없으니 등록금은 점차 인상돼 학생들은 등록금 동결투쟁을, 월급은 도무지 인상이 안돼 교수와 직원들은 파업을 했죠.”라고 말하며 암울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이 때, 이 총장이 내린 결단이 바로 ‘제2창학 선언’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교육 이념, 방향, 목표, 비전을 전부 다시 세우고 제2창학을 계획했죠.” 그렇게 100주년이 되는 2006년까지 숙명 12년 장기발전 계획을 세웠다. 그 중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문제가 공원부지 해제였다. “과거 우리 학교는 부지 확장을 위해 땅을 샀는데 한번은 태풍 ‘사라’로 인해 판자촌이 돼버려 쓸 수가 없었고, 한번은 *김신조 사건이 터지면서 정부가 긴급조치로 수용해버렸어요.” 국가로부터 받은 이러한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이 총장은 매일 아침붜 저녁까지 장관은 물론 전 직원을 만나면서 청원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94년 공원부지가 해제됐다. “이 날이 내 생에 가장 기뻤던 날 같아요. 체질이 바뀔 정도로 힘들고 중환자실까지 실려가면서 고생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였으니까요.”
국유지 해제와 더불어 이 총장은 새로운 건물 11채를 더 짓기 위해 1,000억 원 모금을 시작했다. 이때 그가 낸 아이디어가 바로 ‘등록금 한번 더 내기 운동’이었다. “1000원 모금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당시 우리 학교 최고 모금실적이 2억이었으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죠.”라며 “그래도 동문들이 마음만 연다면 10년 동안 충분히 1,000억 원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어요.”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단 100만원이라도 기부한다면 그는 한걸음에 달려가 몇 시간씩 동문들을 설득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과로 창학 100주년이 되는 2006년, 1,000억 원 초과 모금을 달성할 수 있었다.


행복과 성공의 해답, 리더십


‘2020년까지 대한민국 10%리더 배출’ 이제 학우들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우리 학교의 목표이다. 취임 초부터 리더십을 강조했더 이 총장. 그가 우리 학교의 비전을 리더십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초등학교 반장부터 대학교 총학생회장까지 각종 대표를 맡았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남을 존중하면서 잘 이끌면 나를 믿고 따라주더군요.”라며 “우리 학생들을 보면 착하고 성실한 반면 적극성이나 주도적인 면이 조금 부족했어요. 숙명인의 착한 성품 부족했던 리더십이 접목돼 탄생한 것이 바로 섬김 리더십이에요.”
뿐만 아니라 이 총장은 리더십은 단지 누구를 이끄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예전부터 어떻게 하면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과목이 없어서 답답했어요.”라고 말했다. 이 총장은 리더십 수업이 행복과 성공과 같은 추상적인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우리 학교만의 독특한 고유 자산이라며 “수업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핵심가치를 찾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우리 학교에서 주최하는 성년례도 리더십 함양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만 20살에 성년례를 기점으로 리더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고 자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됐죠.” 이렇게 시작된 성년례에서 당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춤추는 총장’이다. “예전에 안면이 있던 영화 007 주연배우 ‘로저무어’가 우리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마침 그날이 성년례를 하는 날이라 함께 보러 갔죠. 그러다 같이 무대에 올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로저무어가 쇼맨십을 발휘해 트위스트 춤을 췄어요. 그때 함께 춤을 춘 것이 지금의 ‘춤추는 총장’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우연히 시작된 성년례 퍼포먼스는 매년 다채로운 내용들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쉬운 영어, 영어공교육의 첫걸음


2008년은 이 총장에게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특히 인수위원장으로 지낸 올 겨울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인수위원장 시절 이 총장이 영어공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대한민국은 찬반양론으로 들썩였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지금, 그가 말하는 영어공교육과 우리 학교의 영어 교육에 대해 들어봤다. “영어공교육은 ‘학생들이 생활영어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에서 시작됐어요. 어려서부터 이론적인 문법을 공부하고 단어만 달달 외우니까 결국 영어에 싫증내고 기피하죠.”라며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를 쉽게 읽고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한다며, 이것이 영어공교육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 중 한가지 방법이 어린이 영어 도서관을 구축하는 것이에요. 아이들이 자유롭게 영어를 읽고 들을 수 있는 영어 도서 시설을 통해 영어와 친해지는 것이죠.” 이처럼 제도ㆍ시설면에서 뒷받침된다면 중ㆍ고등학교에서 문법을 배우고, 대학교에서는 원어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총장은 우리 학교 또한 원어 강의를 늘리려고 했지만 학우들의 소극적인 참여와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 강의 진도 문제 등 개선해야할 면이 여전히 많아 과감하게 시도를 못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들이 해결되기 위해선 초등학교 때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돼야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 총장의 영어에 대한 관심은 ‘우리 학교의 세계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최근 매입한 서울역 부근의 1106평짜리 건물은 앞으로 우리 학교 외국인 학생 기숙사로 사용돼 예정이다. “적어도 재학생 중 10% 이상이 외국인 학생으로, 전체 교수 중 20% 이상이 외국인 교수로 있어야 대학 세계화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어요. 이 기반을 쌓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외국인 전용 기숙사에요.”라며 “영어공교육이 정착되면 영어와 친숙해진 학생들이 앞으로 지어질 외국인 기숙사에서 자연스럽게 외국인 학생들과 대화하는 풍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세계화가 이뤄지고 있는 캠퍼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원한 인생의 스승 ‘숙명여대’


언제나 숙명을 위해, 숙명과 함께 해 온 이 총장이지만 퇴임을 얼마 두지 않고 스스로에게 아쉬운 점이 남는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멋진 체육관 하나 지어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요.”라며 빠듯한 재정과 시간으로는 체육관을 짓기에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규칙을 준수하고 페어플레이를 통해 공정성을 익히고, 훈련을 하며 팀워크를 쌓는 모든 것들이 체육을 통해 배울 수 있어서 꼭 지어주고 싶었는데….”
이처럼 학생에게 한없이 베풀어도 부족하다는 이 총장에게 숙명은 사랑과 헌신을 가르져 준 ‘인생의 스승’이라고 한다. “나에게 고난이 축복이 되는 걸 가르쳐준 곳이 바로 숙명이에요. 쓰러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결실을 이루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찾아왔죠. 그 과정을 통해 조건 없는 사랑을 알게 됐고, 사심 없는 헌신도 실천할 수 있었어요.”라며 “고난의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숙명여대를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숙명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준비한 종이를 펼쳤다.
“첫째, 매일을 새롭게 시작하세요. 둘째,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세요. 셋째, 배우려는 겸손함을 갖추세요. 넷째, 항상 기뻐하세요. 다섯째, 언제나 감사하며 기도하는 삶을 사세요. 난 우리 숙명인들이 잘 해내리라고 믿어요.”


스승이자 분신이었던 숙명과의 이별을 2개월 남짓 남겨두고 이 총장은 아직도 꿈을 꾼다고 한다. “제 꿈은 전 세계 곳곳에 100개의 S 리더십센터를 만드는 것입에요.”라며 “우리 학교에서 공부한 많은 외국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 여기서 배운 것을 토대로 리더십센터를 만드는 것이죠. 생각만으로도 벅차요.”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공부하고 기회가 생길 수 있도록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까지 보였다. 숙명여대의 총장으로서 보낸 14년이 고단하기도 하련만, 지금도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그의 모습에 ‘역시 이경숙’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주저앉아있던 숙명을 일으킨 그의 노력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하는 도전정신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들을 이끌어 나갈지 그 행보가 기대된다.
인터뷰를 마치려던 찰나, 그가 말한다. “언제나 숙명을 지켜보며 도울게요. 2020년엔 우리 숙명인이 대한민국 10%의 리더가 되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김신조 사건 : 1968년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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