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들어와 처음으로 원고지 3매짜리 기명(記名)기사를 쓰던 기억이 납니다. 나름대로 글 쓰는 일은 자신 있어 신문사에 지원했던 만큼 쉬이 글을 써내려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기사를 쓰려고 폼을 잡은지 한 시간 넘도록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같은 자리만 뱅뱅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고작 3매짜리 기사를 반나절 꼬박 걸려 어렵사리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눈물 반 진땀 반 첫 기사를 완성시고 2년 반이 흐른 지금, 이제 제게 더 남은 기사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신문사 생활을 했으니 당연히 글 쓰는 일이 쉽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확실히 속도는 빨라졌습니다. 지금은 원고지 3매짜리 기사를 쓰는 데에는 30분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간단한 단신 기사에만 해당하는 일입니다. 기사를 쓰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손가락을 자판에 떼고 누르는 일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글이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부터입니다.


글은 때때로 제게 ‘공포’를 안겨다줬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쓴 기사라 할지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글이었다면 거르지 않고 항의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입니다. 취재원처럼 기사 내용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기사 내용과는 상관없는 익명의 독자에게서도 종종 타박을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항의전화가 주로 오는 월요일, 화요일은 언제부턴가 제게는 가혹한 시간이 돼버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글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뿌듯함이 든다는 것입니다. ‘나의 글이, 우리의 신문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 덕분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글이 저에게 주는 것이 공포인지, 뿌듯함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집니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형태든 자극을 받은 저는, 쓰고 있던 기사를 다시 프린트해 볼펜으로 색연필로 죽죽 긋고 첨삭하곤 합니다.


이제 이 신문사를 벗어나면 스스로 쓴 글에 빨간 줄을 좍좍 그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 입니다. 항의전화를 받을 일이 없으니 느긋하게 월요일 아침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쓴 글로 인해 되받은 강렬한 자극들은 마치 중독처럼 몸에 스며 신문사를 나가서도 한동안 괴롭힐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듭니다. ‘이 칼럼은 또 어떤 형태로 나를 괴롭힐까?’ 사뭇 궁금해지는 지금 저는, 마지막 퇴고(推敲)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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