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재벌가 출신이나 해외유학파가 아니면 어렵다는 통념이 있다. 더구나 여성에게는 단지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위직에 오르는 걸 가로막는 ‘유리 천정(Glass ceiling)’이 존재한다. 이 같은 ‘유리 천정’과 ‘통념’을 부수고 최고경영자로 우뚝 선 여성 기업인이 있다. 바로 첨단기술제품의 소재(素材) 생산업체인 ‘코닝’의 한국법인 대표이사사장 이행희(사학 86졸) 동문이다. 이 동문을 만나 맨 손으로 ‘유리 천정’을 깨기까지의 어려움과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여성 경제인
미국에 본사를 둔 ‘한국코닝’ 입사 16년 만에 이 동문은 한국법인 최고경영자인 대표이사사장이 됐다. 이듬해인 2005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주목해야 할 아시아 여성 경제인 10인’에 이 동문의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사실 뽑힌 것도 몰랐어요. 한 일간지에서 인터뷰 요청을 하기에 왜냐고 물었죠. 그때서야 선정됐다는 걸 알았어요.” 월스트리트저널이 이 동문을 선정한 것은 한국에서 외국 대학이나 명망가 출신이 아닌 여성이 최고경영자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이유였다. “첨단기술제품을 취급하는 회사에서 공학도도 아닌 사람이 말단 사원에서부터 올라왔다는 것도 상당히 놀라웠던 모양이에요.”


이후 이 동문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게 됐다. “유명해졌다는 게 영광스럽지는 않아요. 남보다 더 잘할 수 없을 때는 더 충실하게 일했을 뿐이고 그걸 인정받았다는 게 감사하고 고마운 거죠.” 그는 선정된 소감에 대해 ‘돌을 하나하나 쌓다보니까 어느 날 그게 석탑이 된 걸 본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유명해졌다고 제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다만 인터뷰와 강연 때문에 말을 할 일이 많아졌을 뿐이죠.”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삶
이 동문의 표현대로 현재의 그가 있기 까지는 ‘돌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꿋꿋한 노력이 필요했다. “현재까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들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그만큼 당시에는 대졸 여성이 직장에 들어가기가 어려웠고 들어갔더라도 가정을 이루면 다들 그만두기 마련이었어요. 지금과는 참 달랐죠.”

사학을 전공한 이 동문은 졸업 후 한국문화재관리국 보조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문서와 옥편 앞에서 종일 앉아있는 일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에 그는 보조연구원 일을 그만두고 보다 활동적인 기업인이 되기를 꿈꿨다. 80년대 당시 국내기업에서는 여성 신입사원을 거의 뽑지 않았다. 때문에 이 동문은 국내기업보다 좀 더 개방적인 외국계기업 입사를 목표로 공부했다고 한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는 주경야독의 시작이었다. “점심시간을 쪼개 밥도 굶어가며 영어 학원에 다녔어요. 일이 끝난 저녁에는 무역실무와 영어타자를 익히러 다녔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똑똑했던 거 같아요.(웃음) 그때는 누구도 취업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이 동문은 외국계기업 ‘한국코닝’에 입사했지만 남성중심의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동문은 업무 상대에게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저 사람이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나 봐요.” 하지만 어려움은 오히려 일에 대한 자극제로 작용했다. “처음에는 인정 못 받는 것 같아서 화가 났고 차별 받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죠. 하지만 그럴수록 제가 더 잘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게는 ‘어려움’이 불타는 열정을 끓어오르게 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직장여성이라면 술자리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 이 동문은 어땠을까? “예전에는 ‘저 사람은 여자라서 술 못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오기로 많이 마시기도 했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제가 너무 예민했던 거예요.” 그는 남성과 똑같이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일로써 결과를 보여주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여자라서’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술에 약하기 때문에’ 못 마시는 거라고 생각해야 돼요.”


순수 문과 출신인 이 동문에게 회사에서 다루는 첨단기술과 화학용어는 낯설기만 했다. 그는 직장 동료와 ‘늦게 오는 사람이 점심밥값 내기’를 걸고 아침 7시부터 출근해 화학용어와 회사 제품에 대한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제가 밥값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웃음)” 낯선 공학공부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질문에 이 동문은 “어려워서 힘들다기보다는 새로운 걸 배워서 좋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고객이 회사에 왔는데 담당하는 상사가 자리를 비워 이 동문이 고객과 시간을 보내야했다고 한다. “고객과 회사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대화가 되더라고요. 스스로도 놀랐죠. 그동안 공부한 게 쌓였던 거예요.”


이 동문은 직장생활을 하며 1995년에는 고려대 경영학 석사를, 2002년에는 우리 학교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밤 10시까지 대학원을 다녔으니 그는 또다시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기가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이 동문은 회사에 다니며 공부했기 때문에 MBA 과정을 더 잘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무 경험을 갖고 공부하니까 더 재밌었어요. 배울 때 마다 ‘아~ 이 말이 이 말이었구나!’ 했죠. 그때서야 배움이 이토록 재미있다는 걸 알았어요.”

적극적으로 ‘놀았던’ 대학생
사학이 아니라 경영학을 전공했다면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동문은 “그랬겠죠. 하지만 난 지금도 대학을 가라면 사학과를 갈 거예요.”라고 답했다. “사학을 공부한 건 지금까지 살아가는데 큰 힘이 돼 줬거든요. 중국사나 한국사를 배우면서 삶에 대한 원리와 철학을 배웠던 게 지금 하는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줄곧 공부를 하며 살아온 이 동문이지만 의외로 그는 대학 시절 공부보다는 노는 걸 더 좋아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 별로 못했어요. 열심히 놀았죠. 그 당시는 시대적으로도 그랬었죠.” 그는 체육대회와 축제, 학술제 등의 학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열심히 놀았다는 건 대학 생활에 적극적이었다는 말이에요. 저는 운동에도, 노래에도 소질이 없었지만 대학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고 싶었어요.”


이 동문은 대학 시절을 추억하며 요즘 학교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얼마 전 학교에 특강을 하러 갔는데 한 학생이 선물을 준다며 강단에 올라왔어요. 그런데 아주 짧고 예쁜 치마를 입고 있더라고요. ‘와~학교도 변했구나’ 했죠. 우리 때는 그런 멋스러운 복장이나 화장을 하면 교수님들께 야단을 맞았거든요.(웃음)”


삶의 방향 돼 준 나의 ‘꿈’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16년 만에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 이 동문의 삶을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비전이고 꿈이죠. 제가 만든 비전은 30대에 회사의 대표가 되겠다는 거였어요. 그 당시에는 스스로도 ‘너무 황당하잖아, 이게 말이 돼?’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됐잖아요.” 그는 비전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이 동문은 얼마 전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라는 책을 직원들에게 손수 나눠주며 스스로의 비전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동문은 숙명인들에게 프로로서 당당한 삶을 살기를 당부했다. “제일 중요한건 자신감이에요. 과신과 오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죠. 매 순간순간 나한테 충실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충실할 수 있는 자세를 갖는다면 프로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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