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은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터전이다. 용산엔 여러 나라 문화가 자리 잡은 이태원과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용산기지, 해방촌 등 근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용산은 어떤 시간을 보내왔을까? 용산역사박물관에서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희로애락을 품고 있는 용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잠자는 용, 역사의 중심에 서다
용산역사박물관 1층 상설 전시는 조선시대 이야기로 시작된다. 조선시대 용산은 *세곡이 집결되는 물류 중심지였다. 산등성이와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의 모습이 용을 연상시켜 용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19세기 초 도성 안팎의 도로를 표기한 ‘조선성시도’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지도 속 용산방, 둔지방, 한강방이라 표시된 일대가 오늘날 용산에 해당한다. 지도를 보고 군수품 출납을 맡던 군자감, 얼음을 관리한 서빙고, 기와나 벽돌을 제조한 와서, 가축사육을 관장한 전생서 등 물류와 관련된 주요 관청들이 용산에 집중적으로 설치됐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대문 중 숭례문과 맞닿아 있는 용산은 점차 물류 중심지로 발전해나갔다. 각 지역의 배들은 운송된 세곡을 빠르게 창고로 옮길 수 있는 용산 항구로 모였다. 설명과 함께 세곡을 나르는 조운선과 수레가 전시돼있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 모형과 물길을 따라 형성된 시장 그림도 볼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세곡이 포구에 들어오는 날 장터를 열었다. 시장에선 한양에서 볼 수 없던 지방 특산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림엔 시끌벅적한 장터에 실제로 온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조선시대 용산의 위치가 그려진 조선성시도다.
▲조선시대 용산의 위치가 그려진 조선성시도다.

용산엔 청일전쟁을 계기로 군사기지와 근대시설이 건설됐다. 1904년 청일전쟁 당시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은 대한제국 영토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일본은 한양 도성 내부와 접근성이 좋은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인 조선군사령부를 지었다. 일본은 군사령부 부지 일부를 철도 용지로 전환해 용산역을 중심으로 철도국,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근대 철도 시설을 세웠다. 19세기 후반까지 수상 물류 운반의 중심이었던 용산은 철도 교통 중심지로 변모했다. 철도를 주제로 꾸며진 전시실에선 표를 구매하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과 빽빽하게 채워진 열차 좌석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진에선 많은 사람으로 붐비던 용산역의 분주함이 느껴졌다. 해당 시기 일본은 용산역 서쪽을 중심으로 간척사업을 실시했다. 현재 신용산이라 불리는 공간은 당시 만들어진 일본인 **거류지다. 신용산은 병원과 상하수도 시설 등 일본인을 위한 근대시설을 갖춰 자리 잡아나갔다.

▲수화물 가방 모양 TV에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용산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화물 가방 모양 TV에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용산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미군의 용산기지 장기주둔은 용산 사회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45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곧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미 7사단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조선군사령부를 차지한 뒤 그곳을 캠프 서빙고(Camp Seobinggo)라 이름 붙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돼 미군이 우리나라에 상시 주둔했다. 전시장 한쪽 편엔 전 주한미군 행정병 폴 블랙(Paul black)이 복무 기간에 촬영한 사진이 있었다. 사진은 미군위문협회, 야전병원 등 기지 내부 모습과 일상 풍경을 담고 있었다. 서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용산기지 외부 모습도 달라졌다. 해방 이후 월남했거나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 귀국한 동포들이 용산기지 인근 남산 자락에 ‘해방촌’ 마을을 형성했다. 해방촌은 즉석식품과 전자제품 등 신문물이 가득한 미군기지와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촌 주민들은 기지에서 반출된 물품들을 남대문 시장 등에서 판매하며 돈을 벌었다.

용산, 다양성을 품다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용산은 외지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터전으로 거듭났다. 일본군과 미국군이 주둔하며 용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상경한 내국인들도 생업을 찾아 용산에 모여들었다. 본교 김세준 문화관광외식학부 교수는 “고향을 떠나온 이들은 옆집과 앞집 이웃들을 가족 삼아 살아갔다”며 “용산에선 서로를 의지하는 주민 공동체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자 이태원 국제아케이드상가를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를 보며 다양한 문화를 가진 외국인들이 용산을 거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 사이에서 유행한 음악과 미술은 우리나라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해방 이후 용산에 주둔한 미군을 통해 스윙(Swing), 재즈(Jazz), 블루스(Blues) 리듬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국 음악은 신민요와 트로트가 대세였던 한국 가요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실에 마련된 음악 부스에서 당시 미군기지에서 공연했던 가수 현미의 ‘밤안개’(1962) 노래를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음악 부스를 지나자 삼각지 화랑거리 부스와 마주했다. 화랑거리는 삼각지역부터 용산역까지 화랑과 액자전문점이 즐비한 길을 말한다. 미군들이 삼각지에 있던 화랑에 초상화를 주문하며 거리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으로 수출경로가 열리며 화랑거리 화가들은 상업화 제작에 나섰다. 외국 명화를 베껴 저렴한 가격에 수출한 그림은 '이발소 그림' '쫑쫑이 그림'이라 불렸다.

▲과거 이태원의 국제아케이드상가를 묘사한 전시 벽화다.
▲과거 이태원의 국제아케이드상가를 묘사한 전시 벽화다.

용산은 다채로운 종교적 색채도 지니고 있다. 용산엔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신학교인 용산성심신학교와 예수성심성당이 있다. 개신교 또한 1907년 설립된 한남동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일찍이 용산에서 포교를 시작했다. 1976년 이태원에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며 국내 이슬람 교세도 확장됐다. 토속신앙도 활성화됐다. 현재 서울에 위치한 부군당 20곳 중 10곳이 용산에 있다. 부군당은 마을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을 의미한다. 용산 산청동 부군당에선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남이장군 사당제가 매년 열린다.

보고 즐기고 기록하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용산은 과거부터 다양한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2층 기획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겨 ‘숨은용산찾기’ 1관 ‘매체에 투영된 용산’ 앞에 다다랐다. 조선시대 용산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전시 시작을 알렸다. ‘무진추한강음전도’(1508)는 연회가 열리고 있는 제청전을 그린 그림이다. 제청전은 사대부들의 별장으로 오늘날 한남대교 근처에 있었다. 사대부들은 한강과 남산자락이 어우러진 용산의 경치를 즐기고 이를 그림으로 기록했다. 조선시대 아름다운 그림의 배경이 되곤 했던 용산은 외국군 군사기지가 들어서며 온전한 우리 땅이 될 수 없었다. 이전과 달라진 용산의 풍경은 많은 문학 작가에게 영감을 줬다. 「그 여자의 일생」, 「염마」, 「탁류」, 「흙」엔 한강인도교, 용산역, 용산가도 등 용산 안팎 풍경이 등장한다. 전시장 한쪽에 놓여있는 박태원의 단편소설 「피로」엔 한강 인도교가 건설됐지만 이용하지 못하고 언 한강 위를 가로질러야 했던 조선인의 모습이 담겨있다. 잠시 전시장에 비치된 소설을 읽어봤다. 일본인과 고위층만이 사용할 수 있던 근대시설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우리 민족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2관 ‘대중이 흡수한 용산’은 최근 대중매체를 통해 부각된 용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실 중앙엔 커다란 화면이 있었다. 화면을 누르자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드라마 <나의 아저씨>, 영화 <기생충>,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등 작품을 용산 지도와 함께 볼 수 있었다. <아이 캔 스피크>의 주인공은 영어를 배우며 외국인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이태원에 방문한다. 녹사평 육교 아래 벤치에서 등장인물 간 진솔한 대화가 이뤄진다. <나의 아저씨> 속 두 주인공은 백빈 건널목을 함께 걸으며 서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기생충> 속 주인공들은 후암동 도닥다리에서 말다툼한다. 도닥다리의 수많은 계단은 계급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태원 클라쓰>는 다름을 수용하고 다문화가 공존하는 이태원을 배경으로 선택했다. 주인공들은 세계음식특화거리와 이태원 거리 등에서 이야기를 끌어 나간다.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한 용산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했다.

▲ 대중매체 속 용산 일대를 볼 수 있는 화면이다.
▲ 대중매체 속 용산 일대를 볼 수 있는 화면이다.

선조들은 한강과 남산자락이 어우러진 용산의 경치를 즐겼다. 조선시대부터 일찍이 물류와 상업 요충지였던 용산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근대화 중심지로 성장해왔다. 정재희 용산역사박물관 관장은 “용산은 한국 근현대사가 압축된 공간이다”라며 “미래 세대에게 현재 용산이 올바르게 기억될 수 있도록 기록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용산의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자.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모습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세곡: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임.
**거류지: 조약이나 관례에 따라 한 나라가 그 영토 일부를 한정해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허가한 지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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