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입맛은 까다롭다. 그러다 보니 공연을 보는 관객의 흥미를 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입맛에 맞게 작품을 잘 요리해 한 작품으로 10년을 넘게 관객들을 불러들이는 이가 있다. 바로 15여 년 동안 흥행한 <늙은 창녀의 노래>의 공연 프로듀서 김의숙(소비자경제 93졸) 동문이다. 김 동문의 최근작 <민자씨의 황금시대> 역시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에 힘입어 5월 말까지 연장 공연에 돌입했다. <민자씨의 황금시대>가 공연되는 대학로 예술마당에서 ‘대학로를 주름잡는’ 공연 프로듀서 김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제학도, 연극계에 발을 들이다>
김 동문은 소비자 경제학을 전공했다. 소비자 경제학을 전공한 김 동문이 처음 연극을 접한 곳은 우리 학교의 마당극패 ‘고두쇠’에서였다. “당시 나는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회의식이 많이 반영되는 마당극 패에서 활동하게 됐어. 1년에 대여섯번의 공연을 올려야 했었기 때문에 무척 열심히 했어. 그러니까 난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학교는 무척 열심히 다니는 학생이었던 거지.(웃음)” 하지만 그는 학창시절 적극적으로 연극 활동을 하면서도 연극과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 동문은 졸업 후 전공에 맞춰 대기업에 취직을 하게 됐다. 그러나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연극에 대한 열망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희곡 작가가 되기 위해 공연 예술 아카데미인 문화예술진흥원 극작평론 과정을 등록하게 된다. “내 평생 그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 곳에서 작가 분들과 공연보고 애기하고, 과제도 하면서 난 이미 연극인이 된 것 같았어.” 김 동문은 당시의 설레였던 때로 돌아간 듯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곳에서 프로듀서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열심히 하는 김 동문의 모습을 본 작가 이강백 씨가 김 동문에게 극작평론 과정 중 하나인 수료 공연의 총 기획을 맡겼던 것이다. 처음에 김 동문은 이 씨의 기획 제의를 극작가에 재주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는 기획이 뭔지도 몰랐어(웃음). 그런데 일을 해보니 사람을 통솔하는게 재미있더라고.” 수료 공연을 2~3개월 동안 준비하다보니 어느새 기획은 그의 ‘일’이 돼 있었다.


하지만 김 동문이 연극의 길을 걷기까지는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그는 “장녀였던 나에게 기대가 크셨는데 연극을 한다고 하니 너무 실망을 하셨어.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너무 심했어……. 배추장사를 하셨는데, 길거리에서 배추를 던지면서 싸우기도 했지.” 그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고집에 결국 부모님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며 멋쩍어했다. 그러나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집’도 결국은 부모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처수상이 담배가게 딸로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는 것 배웠다고 하잖아. 나도 담배가게부터 장사를 시작하신 부모님에게서 사람을 대하는 법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


<유학 후, 의숙씨의 황금시대>
김 동문은 문화예술진흥원에서 과정을 밟은 후 스물다섯 살 때 공연기획 회사 ‘이다’를 차렸다. 이 때 기획한 양희경의 모노드라마 <늙은 창녀의 노래>, 명계남의 <콘트라베이스> 등의 작품이 흥행하면서 대학로에서 잘나가는 사람으로 통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밟고 있던 김 동문은 화려한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한국에는 없었던 예술경영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예전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없었는데 서른 살이 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어떤 분야에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됐어. 그게 바로 예술경영이었지.” 유학할 당시 IMF와 맞물려 김 동문은 가난한 유학생으로 생활해야 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의 회사인 (주)파임커뮤니케이션즈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다시 대학로에 뛰어들었다.


김 동문은 외국 작품을 번안한 공연대신 순수창작극을 무대에 올린다. “나는 내가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주인공도 나이 들어가기 때문이지. 창작극을 올리는 이유도 그럴듯한 얘기 말고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서야.”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민자씨의 황금시대> 또한 순수 창작극이다. 김 동문의 이런 연극철학에 관객들도 공감했는지 인지도 높은 외국 작품들의 공연에 비해 순수 창작극이 많이 소외되는 현실임에도 극장은 많은 관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그를 지탱하는 힘, 바로 ‘초심’>
공연 기획은 사람을 통솔하며 연극 전체를 이끌어가야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간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의 핸드폰에 저장된 2000개의 전화번호는 폭넓은 사람관계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김 동문의 비결은 특별했다. 그는 “내가 만나는 주어진 시간동안 ‘깨를 홀딱 벗어준다’라고 할 정도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만나.”라며 통화한 내용들을 잊지 않기 위해 빽빽하게 메모해 놓은 다이어리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이렇게 사람을 만날 때 정성을 다한다는 김 동문은 10년 이상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에 자주 출연하는 배우 양희경씨 역시 알고 지낸지 15년이 넘는 사이이다. “나는 회사 대표이기도 하고 낼 모레 마흔이지만 10년 전에 나를 ‘의숙아’ 하고 불러줬던 사람들 앞에 서면 여전히 10년 전의 마음이 유지가 돼.” 이렇게 오랫동안 ‘진심’으로 쌓아온 이들은 김 동문이 초심을 잃지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들은 김 동문이 지금 회사인 (주)파임커뮤니케이션즈를 만들 때도 큰 힘이 됐다. “회사를 만들 때, 유학을 갔다 오느라 생긴 3~4년 공백이 있었기 때문에 잘 해 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에 휩싸여있었어. 그런데 회사 창립식 때 고사를 지냈는데, 그 때 나를 잊지 않은 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의 일을 돕겠다고 찾아왔어.” 그때 찾아온 이들 중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10평 원룸에서 시작한 (주)파임커뮤니케이션즈는 어느새 문을 연지 일곱 해를 맞았다.


그는 2007년 제28회 서울연극제에서 프로듀서상을 수상, 2007년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KAPAP)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실력 있는 공연 프로듀서로 인정받았다.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그이지만 여전히 작품에 대한 욕심은 대단하다. “많은 프로듀서의 꿈은 자손 3대에 걸쳐 상영될 작품을 만드는 거야. 내가 만든 작품도 <캣츠> <오페라의 유령>과 같이 수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공연됐으면 해.”


연극 <민자씨의 황금시대>의 공연시간이 임박해 오자 주변 스텝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마지막으로 “결국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좌충우돌해야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라며 숙명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스타일의 삶을 살기 원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해 보기를 당부하는 김 동문. 사람 만나랴 공연 상황 점검하랴 24시간이 짧은 생활을 해도 늘 초심을 생각하는 그에게서는 한결같은 민들레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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