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영복여고 이아람

 늦은 아침에서 깨어난 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을 참고 겨우 일어났다. 침대 옆의 탁자에는 어제 저녁 번역하다만 영문 소설 한 편이 얌전히 놓여져 있었고 노트북이 깜빡 깜빡 거리며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옆에 자리한 두통약과 자리끼. 나는 두통약 몇 알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두통약을 자주 복용하는 걸 본 친구 령의는 혀를 쯧쯧 차며,

 “거 젊은 애가 뭔 놈의 약이 그렇게 좋다고 시도때도 없이 먹는거야? 너 그거 병이다 병!”

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약이 없으면 두통을 치료하기 힘들 정도로 약에 메여있었다. 느지막한 아침까지 대충 차려먹고는 다시 번역에 몰두하려는데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응, 윤혜구나. 나 령의야.”

 전화를 건 사람은 Y여고 동창이자 대학 동기이기도 한 령의였다. 령의는 여고시절부터 나와 친하게 지낸 아이로, 나와는 다르게 생기 있고 발랄한 처녀였다. 그녀는 이 망상주의자의 어디가 좋은지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나와 줄곧 나와 함께 다녔다.

 “어, 오랜만이다.”

 “하여튼, 여전히 무뚝뚝한 건 똑같네.”

 라고 말했다. 내가 멋쩍은 듯이 웃자 그 아이도 따라 웃었다.

 “저기, 윤혜야. 너 정신과 상담 한 번 받아볼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갑자기 던진 그녀의 말에 무척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니가 너무 단절된 삶을 사는 것 같아서 한 번 정신과 상담 같은 거 받아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글쎄…….”

 나는 쭈뼛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네 아버지의 오랜 친구 분의 자제가 정신과 의사라며 혹시 생각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를 착잡한 기분으로 그녀와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나서 나는 베란다로 가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한 많은 여귀가 뿜어내는 숨결과도 같은 안개가 짙게 깔려있었고 비까지 후두두둑 내리고 있었다. 안개 낀 오후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였다. 나는 햇빛의 베품을 거부 한 채로 늘 안개에만 쌓여 지냈다. 혹시 그녀의 말대로 상담을 받게 된다면 나의 고질병인 우울증은 사라지게 될 것도 같았다. 나는 어느새 그녀의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령의와의 전화 통화 이후 3일쯤 지난 날, 나는 그녀가 알려준 강남의 P병원을 찾아갔다. 혼잡스런 도시의 한 가운데 있는 그 병원의 위치는 무척이나 아이러니 했다. 병원 문을 밀고 들어가자 육감적인 미모의 간호사가 날 맞았다.

“어떻게 오셨나요?”

“상담 좀 받으려고…….”

그녀의 화려한 미모에 온통 정신을 팔고 있던 나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예약 하셨나요?”

“네, 소윤혜라고…….”

“아, 그럼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네.”

나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구질구질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정신병원은 상상 외로 깨끗하고 현대적이었으며 세련된 안목의 가구와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소윤혜씨, 들어오세요.”

“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젊은 남자가 날 맞았다. 나이는 한 서른 정도 되어 보였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단정하게 생긴 의사였다.

“어서오세요 윤혜씨. 령의 친구 분 되시죠?”

“네, 안녕하세요.”

“예, 저는 박철민이라고 합니다.”

라며 그는 내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그는 자리를 권했고 나는 그와 마주보았다.

“네, 그럼 윤혜씨는 저와 무얼 얘기하고 싶으세요?”

“예? 그냥 아무거나요.”

그러자 그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윤혜씨가 가지고 있는 아픔은 어떤 것 인가요? 저는 윤혜씨와 그것을 얘기하고 치유하는 역할이에요.”

나는 왠지 모를 벅차오름이 느껴져서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하기 힘드시면 생각을 조금 정리하셔서 다음번에 말하셔도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얘기하는게 쉬운건 아니니까요.” 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라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시 두통이 오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나를 보더니 얼른 일어나서 부축해주었다. 나는 “괜찮아요.” 라고 말하곤 진료실 밖을 나왔다. 병원을 나왔을 때는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와의 첫 번째 상담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난 날, 나는 다시 그를 찾아갔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날 반기며,

“녹차 좋아하세요?” 라고 묻더니 티백녹차가 아닌 작설차를 준비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따끈한 녹차를 받았다.

“령의하고 친하시죠?”

“네, 그런 편이죠.”

“좋은 친구 두셔서 좋으시겠어요.”

“저같은 망상주의자가 뭐가 좋다고 늘 그렇게 붙어다녔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껄껄 웃으면서,

“왜요, 저도 망상주의잔데요 뭐.”

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깔깔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활짝 웃어 보이며

“웃는게 더 보기 좋네요.” 라고 말했다. 그의 진지한 말투에 당황한 나는 재빨리 대화의 물꼬를 돌렸다.

“그래도 령의한테 고마운 점은 제 인간관계를 개선시켜줘서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그 전에는 어땠는데요?”

“뭐랄까…… 그 전에는 모든 인간관계가 그냥 <아는 사람> 이 정도였죠. 전 약간 피해망상주의적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남들이 저에게 조금 무심하거나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같으면 제가 알아서 점점 물러나는 거예요. 당연히 그러니까 친구와의 관계도 그렇고……. 심지어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아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러니까 애들은 절 피하고 저부터 먼저 알아서 피해주는 거예요. 근데 령의는 그런 절 끝까지 이해해줘서 그 점만은 고마워요.”

 “그랬군요. 그럼 지금 령의는 최소한<아는 사람>은 아니겠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령의한테서 불쑥불쑥 느끼는 이질감 같은 것이 없다곤 말 못하죠.”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잠시 말을 하지 않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윤혜씨는 저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네? 어떤?”

 “<아는 사람> 말이에요.”

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오늘 상담은 여기서 마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아주 오랫동안 지켜왔던 귀중한 비밀을 털어놓아서 매우 후련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 문 밖을 나왔다.

 그와 몇 번 더 상담을 하면서 나는 확실히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령의도 ‘요즘 더 밝아진 것 같아.’라며 놀라워했고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봄바람이 든 계집아이들처럼 행복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음을 눈치 챘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일상 속에서도 그를 떠올렸으며, 그와의 상담이 있는 날에는 그동안 입고 다녔던 롱스커트를 벗어던진 채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를 입고가기도 했다. 나는 점점 더 대담해지면서 그를 유혹해보려는 날 발견하고 꾸짖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상담이 있던 날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서서 병원에 도착한 나는 내가 너무 일찍 왔다는 것을 알았다. 문은 열려있었지만 아무도 없던 것이다. 심지어 간호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하며 나가려는데 그의 진료실에서 무언가 말소리가 들렸다. 얼핏 듣기에 그와 아름다운 그 간호사의 목소리인 듯 했다. 나는 문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유간호사, 오늘따라 몸매가 더 예뻐 보여.”

 “아이참, 선생님도. 자꾸 어딜 만지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들은 서로 깔깔 웃었다.

 “오늘 목요일 맞나?”

 “네.”

 “아, 정말 미치겠네. 오늘 그 환자 오는 날이야.”

 나는 잠시 멈칫했다.

 “누구요?”

 “ 아, 왜 거 있잖아. 소윤혜인가? 그 젊은 여자 말이야. 령의 친구라는.”

 “ 아, 그 환자분이요? 왜요?”

 “완전 싸이코야. <아는 사람> 컴플렉스가 있대나 뭐래나. 령의 때문에 봐주긴 하는데 상담   할 때마다 죽겠어, 아주.”

 “그 여자, 너무 병든 닭같이 생겨서 볼 때마다 답답해서 짜증나요.”

 “아, 그리고 그 여자. 내가 몇 번 다정하게 대해주니까 내가 지한테 넘어간 줄 알고 요즘   계속 미니스커트만 입고 오는 거 알아? 나 참.”

 “정말요? 어머, 웬 일이래!”

라더니 그들은 경박스럽게 낄낄 웃어댔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망치로 한 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띵한 머리를 잡고 뒷걸음질 쳐서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병원에서의 일 후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무기력한 절망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편물을 챙기려 우체통을 뒤지다가 뜻밖의 편지를 발견하였다. 그의 편지였다.


 <당신이 찾아오질 않으셔서 편지로 대신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울했던 저의 옛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병원으로 와주십시오. -철민->


 나는 그의 편지를 읽었다.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는 찢어버렸다, 나는 그것을 버리며 영원한 침묵과 함께 그 역시 <아는 사람>의 바리케이트에 가두어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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