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졸업 무렵 우연히 읽게 된 지드의 단편「탕자 돌아온 후」의 마지막 장면이 눈에 본 듯 떠오를 때가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를 개작한 형식을 띄고 있는 이 단편은 돌아온 아들을 위한 환영만찬이 끝나고 적막한 듯 평온한 어둠에 잠긴 집안을 비추며 반전을 맞이한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려는 돌아온 탕자에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형, 자려는 거야?” 지드는 셋째 아들을 등장시킨다. 별 표정없는 둘째 형은 동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앉는다. “형, 어땠어? 세상이 안 좋았어?” 정확히 기억은 없지만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형은 물끄러미,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 같다. “좋을 때도 있었어. 고생도 했고, 어쨌든 돌아오게 됐어.”


잠시의 침묵의 흐른 후 셋째 아들은 말한다. “형, 나, 나가려고 해.” 둘째 형은 놀라지도 않고 뭐라 대답하지도 않는다. 복잡다단한 감정이 둘째 형의 얼굴을 휘감은 듯도 했지만 어두운 방의 조명은 그 안색을 자세히 비춰주지도 않는다. 좀 더 어색하게 앉아있던 두 사람은 이제 헤어진다. 셋째 아들이 방을 나서고 둘째 형은 자리에 눕는다. 셋째는 모두가 잠든 집을 뒤로 하고 불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대문을 밀고 나간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가슴에 닿았던 무언가가 가끔 느껴질 때가 있다. “왜”라는 질문보다는 “그렇구나”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던 것 같다. 무엇에 대한 긍정이었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작가의 상상력에 대한 감탄이었는지, 종교와 문학의 경계를 봤던 것 같은 느낌이었는지, 세상에는 첫째와 둘째 아들 같은 사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셋째 아들이 있어왔구나 하는 단상들이 밀려왔던 것 같다.


분명하지 않은 동기를 유추하도록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일전에 우리나라의 어느 희곡작가가 지드의 이 작품을 각색한 극본을 본 적이 있는 데, 원작과는 달리 각 주인공들이 자신의 입장과 행위의 이유, 그리고 느낌마저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원작이 허용해줬던 독자 나름의 해석의 여지를 반감시키는 것 같아 오히려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생각이 난다.


한없이 깊어 보이는 어둠을 향해 걸어 나가는 셋째 아들의 뒷모습이 그리 불안해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용기의 표상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평생 천착한 것으로 알려진 신앙의 의미, 기성종교의 도덕률, 인간의 죄의식, 행복에 대해서 그의 다른 유명작품들에서 섬세하게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상식으로는 규정하기 어려운 실존유형을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삶의 한 특징이 불확실성이라면, 셋째 아들은 바로 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것도 최선을 다해, 존재를 걸고 선험조차 없는 그 어떤 곳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가 어둠 속에서 넘어지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강애진(영어영문 전공)교수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