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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평생 내 인생을 받쳐주는 기둥"
이소라 기자  |  smplsr73@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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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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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20대에게 월드컵 축구가 있다면 70~80년대를 살아온 386세대에게는 여자 농구가 있었다. 스포츠가 중흥을 이루던 그 시절의 여자 농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여자 농구의 황금시대를 이끈 주역들 가운데 성정아 동문(체육교육 96졸)이 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 1988년 농구 대잔치 MVP,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금메달, 실업팀 최초의 억대 계약금 돌파 등…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전력을 지닌 성 동문. 이렇게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친 그는 현재 평범한 체육 교사가 되어 제2의 삶을 일구고 있었다. 182cm의 훤칠한 키, 살짝 헝클어진 짧은 머리, 캐주얼한 복장으로 소탈한 이미지를 풍기는 성 동문으로부터 결코 소탈하지만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렸을 때부터 발이 정말 빨랐어요. 집에서 혼나서 도망을 가도, 식구들이 아무도 날 못잡을 정도였죠.” 이렇게 운동에 소질을 보이던 성 동문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 주신 비치볼을 가지고 놀면서 취미로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일단 시작하고 보니까 너무 재밌어 빠져들고 말았다는 성 동문. 그때 ‘취미’로 시작한 농구가 그의 ‘전 생애’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한 이후 매일같이 계속되는 훈련은 너무도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성 동문은 자신이 좋아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으므로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석 한 번 하지 않았으니, 농구도 마찬가지였죠. 낮에 훈련 마치고 와서 밤에 끙끙 앓으면 아빠가 오셔서 ‘힘들면 하지 마라’고 하셨어요. 그럼 그때는 알았다고 대답하는데, 다음날 일어나면 또 운동하러 가고 그랬죠.” 그는 “그때부터 고지식한 면이 있었나 보다”고 말하며 시원스레 웃었다.

잊지 못할 감동, 여자 농구계의 ‘우생순’

성 동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가 대표 선수로 발탁돼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84년 LA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가 첫 출전한 LA 올림픽에서 성 동문을 비롯한 여자농구 국가 대표팀은 훗날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여자 농구계의 신화를 만들었다. 아시아의 강호로 손꼽히는 중국을 이김과 동시에 우리나라 역대 올림픽 참가 이래 처음으로 단체 구기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성 동문은 그날의 일이 마치 기적 같았다고 말한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죠. 쿠바 프레올림픽 예선전에서는 거의 40점 차이로 중국에 져서 본선행 티켓도 못 땄으니까요.” 그렇게 LA행은 꿈도 못 꿨을 우리나라 여자 농구팀에게 놀랍게도 자동 출전권이 생기는 행운이 주어졌다. 당시 미국과 대립 중이던 소련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들이 LA 올림픽 본선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그 출전권이 우리나라 팀에게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여자 농구팀은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거 뭐 하러 가냐’ ‘비행기 표 낭비다’라며 출전을 만류하기도 했죠. 그런데 우리가 한 경기 한 경기 이겨나가니까 사람들의 시선도 어느새 바뀌더라구요.” 우승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여자 대표팀은 중국을 꺾고 올림픽 은메달 획득이라는 값진 쾌거를 이뤘다. 불과 몇 달 전 참패했던 경기를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묻자 성 동문은 “팀원 모두 다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냈어요. 생각해보면 모두들 자기 역량을 120%까지도 발휘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당시 대표팀의 막내였던 성 동문 역시 실력 발휘를 톡톡히 하며 승리의 경인차 역할을 했다. 무려 2m 15cm였던 중국팀 센터 진월방 선수와 30cm 넘게 키 차이가 났음에도 그를 꽁꽁 묶어 놓았던 것이었다.

팀의 플레이를 맛깔나게 하는 무채 같은 센터

만화 『슬램덩크』의 유명한 대사가 있다. “북산에 득점을 할 사람은 많다. 너는 횟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채처럼 그들의 숨은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극중 능남의 주장 센터인 변덕규가 경기 중 쓰러진 북산의 주장 센터 채치수에게 하는 말이다. 이처럼 농구에서 센터라는 포지션은 눈에 크게 띄지 않지만 묵묵히 팀을 지탱하는 기둥과 같다. 득점보다도 골대 밑에서 몸싸움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다부진 체격의 선수에게도 센터 역할은 힘들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작은 키였던 성 동문은 다른 사람에 비해 갑절은 힘들었으리라. 그러나 성 동문은 “내가 그 선수한테 무너지면 거기서 끝나는 거니까 상대팀 선수의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죠. 근데 내가 기둥 역할을 잘 소화해서 상대팀 기둥을 쓰러뜨리면 우리 팀이 이기는 거잖아요? 나는 내 자리만 꿋꿋이 지키고 있으면 됐었어요.”라며 쑥쓰러운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LA 올림픽 때 진월방을 훌륭히 막아낸 성 동문의 몸값은 이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야말로 선수 생활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그러나 곧 시련이 닥쳤다.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 입단한 후로 시즌만 되면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무려 3년간 시합에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스카웃 파동을 일으키며 적지 않은 몸값으로 들어왔지만 정작 코트에서 뛰지 못하게 된 그는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너무 뛰고 싶어서 눈물이 나는 거야. 아침에 눈뜨고 다른 선수들 연습하러 나가면 숙소에 앉아서 막 울었어요.” 잦은 부상으로 인해 포기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 성 동문은 결국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농구대잔치 MVP로 선정되는 등 각종 상을 휩쓸며 명실상부 그 시절 최고의 여자 농구선수, 최고의 센터의 입지를 굳혔다.

제2의 삶…평범한 일반인으로 컴백

계속된 부상, 체력의 한계로 인해 결국 그는 화려한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 동문에게 있어 또 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다들 졸업해서 가정을 꾸릴 나이에 그는 우리 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쉬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니 하나부터 열까지 만만한 일이 없었다. “어려움? 엄청났죠. 시험을 볼 때 문제가 이렇게 나오겠구나 생각하고 가면 전혀 딴판인거야. 답답하지. 백지로 낼 수는 없고 내가 공부했다는 티는 내야 하니까 문제를 다 고쳐서 아예 새로 문제를 만들고 답을 쓴 적도 있어요.” 학업뿐 아니라 선ㆍ후배 관계에 있어서도 성 동문은 난감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나이도 한참 어린 선배들이 집합하라고 하면 내가 워낙 융통성이 없으니까 안가도 되는 걸 또 갔죠. 그땐 다들 명찰이 있었는데 나이 스물일곱씩이나 먹어서 노란 명찰 달고 신입생 사이에 서 있으려니 그때서야 내가 여길 왜왔나 싶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는 나름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었다고.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4년을 보낸 성동문은 졸업을 약 20일 앞두고 현 삼일상고 이윤환 농구부 감독과 결혼함으로써 대학 생활을 마감했다.
대학 재학 중 교직을 이수했던 성 동문은 현재 영생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 올해는 1학년 담임을 맡았다는 그는 학생들에게서 옛 농구 스타라기보다는 ‘재밌는 선생님’으로 더욱 통한다. 학생들을 지도하며 즐거웠던 점, 어려웠던 점들을 털어놓는 그는 영락없이 우리네 고교 시절 선생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끔 옛날 팬으로부터 전성기 활동사진이 담긴 선물이나 편지가 오면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선생님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랑을 한다고. 말을 잇는 성 동문의 얼굴에는 행복 가득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성 동문의 얼굴은 시종일관 편안했다. 그는 현재 교사로서,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누리는 그 모든 것들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농구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이 좋겠느냐는 기자의 말에 성 동문은 “농구는 내 인생의 기둥”이라고 말했다. 그가 농구 코트에서 팀의 기둥으로 뛰었듯이 코트를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농구는 그의 인생을 보이지 않게 받쳐주는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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